↑ 유니클로 야나이 다다시 회장/ 사진=연합뉴스 |
최근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부호 순위에서 일본인 1위는 캐주얼 의류 '유니클로'로 유명한 패스트리테일링(Fast Reailing)그룹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 겸 사장입니다.
146억달러(17조7천억원)의 자산으로 세계 57위다. 2년 연속 일본 최고부자에 오른 야나이 회장은 1949년 2월 7일생으로 만 67세다. 재일동포 사업가인 손정의 사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의 사외이사로도 활동합니다.
그는 변방의 비주류에서 일본 최고의 혁신가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물갔다는 의류업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양복점에서 출발해 스웨덴의 H&M, 스페인의 자라와 겨루는 세계적인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를 키워냈습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이 일본사회에서 혁신을 단행할 수 있는 몇몇 되지 않는 이단아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회사 이름 만큼이나 발빠른 행보로 성장해왔습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이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다른 회사(4월1일)보다 한 달 빠르게 입사식을 치르는 것도 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지난 2일에도 야나이 회장은 도쿄도내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세계 여기저기 점포에서 많은 사원들이 활약하고 있다. 회사를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
야나이 회장이 일본 제1의 부자에 오른 길은 곧 유니클로의 성장과정입니다.
자산에서 패스트리테일링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지분율은 21.67%(작년 8월말 현재)입니다.
그는 포브스의 부호 순위에서 2007년만 해도 세계 95위, 일본 6위였습니다.
그가 일본인 1위에 오른 것은 추정자산이 61억달러가 된 2009년이지만 늘 수위를 유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맞수'는 손정의 사장입니다.
야나이 회장은 2011년 76억달러로 일본 부호 2위로 밀려났는데 당시 1위는 손 사장이었습니다. 2012년 1위를 탈환했지만 2014년에는 다시 손 사장에게 1위 자리를 내줬습니다. 2015년부터 야나이 회장이 다시 1위에 올랐습니다.
유니클로 '의류 왕국'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양복점이 밑천이 됐지만 온전히 그의 노력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의 전신인 작은 양복점은 1949년 야마구치(山口)현의 소도시인 우베(宇部)시에 문을 연 '멘스숍 오고리(小郡)상사'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1984년까지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1999년 2월에 80세로 타계했는데, 유산은 당시 세무서 공시에 의하면 27억1천500만엔이었습니다.
그의 백부 야나이 마사오는 부락(部落)해방운동가 출신입니다.
일본에서 부락은 우마상이나 가죽제조업자, 숯굽는 사람, 돼지 키우는 재일한국인 등이 집단으로 거주한 지역을 의미했고, 지금도 일부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마사오는 이들 소수자의 인권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인권운동단체인 전일본동화회 초대회장, 전일본동화회 야마구치현 연합회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멘스숍 오고리상사의 전신인 '오고리상사'를 창업한 실업가이고도 했습니다.
정치에도 뛰어들어 일본 사회당 공천을 받아 1946년 야마구치시의회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마사오의 아버지(야나이 회장의 조부)는 젊은시절 소와 말을 취급하는 우마상을 했는데, 마사오 역시 초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부친의 우마상을 돕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이후 마사오는 교토 식당 종업원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잠시 야쿠자(조직폭력배 집단)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형무소까지 다녀온 뒤 손을 떼고 실업가로 변신한 것입니다.
백부 마사오의 오고리상사가 후에 야나이 회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야나이 회장 집안에는 부락민들이 펼친 수평사 창립에 관여하고, 야마구치현 수평사연맹본부 임원을 맡은 이도 있는 등 부락해방운동과 밀접합니다.
야나이 회장 집안은 이렇듯 변방의 비주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베시에서 태어난 그는 현립 우베고등학교를 나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자스코(현재의 이온 리테일)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월급쟁이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싫증이 나 9개월 만에 퇴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년 정도 친구 집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오고리상사에 입사합니다.
오고리상사는 신사복 등 남성대상 의류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12년간 경영하는 사이에 도심 밖에 전문점포를 두고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이른바 '교외(郊外)형 신사복점'이 커나가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이때 야나이 회장의 선택은 캐주얼의류 판매점이었다. 후발주자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캐주얼은 신사복처럼 접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물건이 좋으면 팔린다는 점도 선택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신사복을 버리고 캐주얼 의류를 택한 것은 혁신에 가까웠습니다.
198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고리상사 사장에 취임한 그는 같은해 6월 일본 서부 히로시마(廣島)시에 유니크한(unique) 의류(clothes)라는 뜻의 '유니크 클로징 웨어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 약칭 유니클로)' 1호점을 열었습니다.
그 후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주고쿠(中國)지방을 중심으로 점포를 확대해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됐습니다.
옷은 패션이라기보다 생필품이라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야나이 회장은 "옷이 지위의 상징이던 시대를 벗어나 일상을 사는 편안한 생활도구인 시대가 됐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두 아들을 둔 야나이 회장은 6년 전까지는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습니다.
그는 경영승계를 꺼리는 이유로 "가족승계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아들이 쉽게 회사 대표가 된다면 열심히 일해온 직원들은 박탈감이 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2002년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인지 최근 들어 입장이 바뀌는 기류입니다.
일본 1위 부호인 만큼 경영권이나 재산 상속 모두 일본 사회의 민감한 관심사입니다. 그가 올해 67세라는 점도 아들들에게 시선이 쏠리게 합니다. 장남 야나이 가즈우미는 2011년 링크띠어리홀딩스의 회장 겸 사장으로 취임했고, 다음해에는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집행위원이 됐습니다. 차남 고지는 201
골드만삭스에서 경제 감각을 익힌 장남 가즈우미가 경영일선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나이 회장도 2014년부터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아들들에 대해 "각각 회장, 부회장 같은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