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 러시아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초강수'를 선택했다.
이는 미국 국내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엄중 경고하는 동시에 차기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친러시아 외교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이중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바마 정부의 이번 러시아 제재는 외교·경제·안보 3대 분야에서 이뤄졌다.
외교적으로는 외교관 35명을 추방했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 72시간 내에 미국을 떠나야 한다. 미국 내 러시아 정부 소유 시설은 폐쇄하고 30일 오후부터 러시아 관계자들의 시설 접근을 차단했다. 미국은 러시아 외교관을 사실상 정보요원으로 간주했다. 폐쇄된 시설은 러시아 정부 요원을 위한 휴게시설이었으나 미국은 이곳에서 정보교환과 분석이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했다.
백악관은 "추방된 외교관들은 외교적 지위와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양대 정보기관인 러시아군 총정보국(GRU)과 러시아연방보안국(FSB)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 금융시스템 접속을 차단했다. 이들 정보기관을 지원하는 특별기술국(STG)과 인력 트레이닝 기관인 데이터프로세싱디자이너교수연합(PADDPS), 그리고 기술연구기관인 조르시큐리티(Zorsecurity) 3대 기관도 제재했다. 개인 제재대상은 이고르 발렌티노비치 GRU국장과 미국 은행을 해킹해 1억 달러를 빼돌린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보가체프, 그리고 해킹으로 개인식별악성코드를 유포한 알렉세이 알렉세이에비치 벨란 등 6명이다. 보가체프와 벨란에 대해 연방수사국(FBI)은 각각 현상금 300만 달러와 10만 달러를 걸고 수배명단에 올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의 공격적 행위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 조치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선택한 시점과 장소에서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할 것이며 일부는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기관 등에 대한 사이버 상의 보복조치 가능성이 제기됐다.
퇴임 20여일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에 이 같은 고강도 제재조치를 단행한 것은 친러시아 성향을 보이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하기 전에 미리 러시아의 대선개입 사실에 대해 '쐐기'를 박겠다는 시도로 풀이된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대선개입 의혹이 제기되자 줄곧 "말도 안되는 소리" "대선 해킹은 컴퓨터 시대 발전의 소산" "힐러리가 이겼으면 이런 얘기 나오지 않았을 것" "해킹은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다"고 발언하며 러시아를 두둔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의 제재는 트럼프가 취임하고 나면 러시아의 대선개입 및 해킹 사실이 묻힐 것을 우려해 퇴임하기 전에 사실관계를 분명히 해두려는 목적이 있었다.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온 트럼프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적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의 러시아 제재 소식이 전해지자 트럼프는 성명을 통해 "미국은 이제 더 크고 더 좋은 일로 넘어가야 할 때"라고 '딴소리'를 했다. 지난 28일에는 기자들의 러시아 해킹 관련 질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 제재로 러시아 대선개입은 기정사실화됐고 트럼프가 이를 뒤집는다면 러시아에 대해 반감이 많은 미국 여론이 트럼프에게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로서는 자신의 친러시아 외교를 위해 제재를 뒤집을 수 없는 '외통수'에 갇힌 셈이다.
미국 신·구 권력의 갈등과 무관하게 미국과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으로 줄곧 마찰을 빚어온 미·러 양국 간 갈등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AP·AFP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크렘린궁은 미국이 러시아에 부과한 새 제재가 전혀 근거 없는 조치라면서 이에 '적절한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비서는 "미국의 이런 결정과 제재는 사실무근일 뿐 아니라 국제법상 불법"이
페스코프 대변인은 또 "임기가 3주밖에 남지 않은 '절름발이' 오바마 정부가 곧 취임할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구상에 해를 끼치려는 것이 명백하다"고 비난했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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