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윌레미스테(Ulemiste) 테크노폴리스. 이곳은 19세기 말 러시아제국 시절 조성된 철도객차, 기계 등을 생산하는 공장 지대였다. 1991년 구소련 체제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2005년부터 이곳을 디지털 공화국(e-Republic)으로 가는 관문으로 바꿔나갔다.
이 단지내 루트샤(Lootsa) 거리 내 건물에 가면 비밀의 벽이 하나 있다. 푸른색 벽화에 'enter e-Estonia' 라는 글씨가 크게 써 있는 벽이다. 이 벽화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에스토니아가 꿈꾸는 세계가 나온다. 이곳(e-에스토니아 쇼룸)에서 미디어전문가로 일하는 페데리코 플랜테라 씨. 그는 이탈리아인이다. 에스토니아 핵심 정책 홍보를 이탈리아인이 담당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그는 "에스토니아의 혁신 실험에 매료돼 전자영주권(E-Residency)을 신청했고, 아예 탈린에 와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만 전세계에서 방문단이 680차례 이곳을 찾았다.
전자영주권 제도는 2014년 말 에스토니아가 세계 최도로 도입한 제도다. 사이버 세계에 가상의 영주권을 주고, 세계 어디서나 에스토니아 가상의 영토에서 창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도입 3년 만에 전세계 150여개국에서 2만 8000명이 전자영주권을 신청해 받았다. 한국에서는 260여명이 전자영주권을 취득했다. 이들이 창업한 회사는 2500여개를 넘어섰다. 2021년까지 2만개 기업이 전자영주권을 토대로 설립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플랜테라 씨는 "전자영주권을 받고 18분 만에 법인 설립을 완료한 경우도 있었다"며 "EU에서 이렇게 간편하게 법인을 설립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국가 효율성도 대폭 제고됐다. 에스토니아는 한국을 특히 협력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 1호 전자영주권 수령센터를서울에 두기로 하고 지난해 12월 개소했다. 굳이 에스토니아까지 오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서울에서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세계 주요 국가, 기관들이 에스토니아가 만든 전자영주권 제도에 주목하고 있다.
나스닥은 2016년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을 가진 주주들에게 전자투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하고 시범 운영 중이다.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 보유자를 사이버 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검증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스닥은 "주주총회 등에서 블록체인 기반 전자투표 서비스를 도입하기 위해 에스토니아 정부와 손을 잡았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최근 아마존, 이베이 등과 새로운 논의를 하고 있다. 인증 기반이 취약한 제3세계 국가 국민 중 전자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전자상거래를 하게 해주는 방안이다.
에스토니아는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전자영주권 신청자에게 일종의 코인을 나눠주고 가상화폐처럼 쓰게 하는 방안이다. 에스토니아는 국가차원의 가상화폐인 에스트코인(estcoin) 발행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개별 기업들이 주식대신 코인을 발행하는 것에 맞춰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이 모든 혜택은 전자영주권을 가진 사람에 한해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 블록체인 시대에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이 본인이 속한 국가 시민권보다 더 중요한 신분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에스토니아는 이렇게 블록체인 기반 국가 건설을 향해 차근차근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룩셈부르크에 '데이터 대사관'(Data Embassy)를 개설했다. 에스토니아 국가서버를 룩셈부르크에 설치하고 클라우드 기반 정부를 확장한 것이다. 룩셈부르크 내 서버가 있는 지역은 에스토니아 영토로 인정해주기로 룩셈부르크 정부와 합의했다. 정부 내 문서결재 뿐 아니라 병원 처방전 등도 100% 가까이 전자결재로 이뤄진다. 에스토니아 전자주민증(e-ID카드)은 교통, 교육 등 모든 활동에서 신원 확인 수단이 됐다. 2007년부터는 전자주민증을 모바일폰 속으로 가져왔다. 전자결재가 안되는 것은 결혼, 이혼, 부동산 거래 등 3가지 뿐이다.
에스토니아가 지난 15년간 시행한 전자 서명 건수는 EU 전체의 전자서명 건수보다 많다. 종이로 서명시 매달 에펠탑 높이로 종이가 쌓일 것을 디지털로 전환시켰다. 연말정산도 3분이면 끝낼 수 있게 세제도 디지털화시켰다.
에스토니아 기반 IT사업을 하고 있는 장석재 K-챌린지 대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앞다퉈 에스토니아를 방문해 협력 의사를 타진했다"며 "한국도 에스토니아가 가진 디지털 인프라에 주목하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탈린(에스토니아) = 김정욱 국차장 / 박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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