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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멘트 】
한국판 '아우슈비츠'.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지 34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거리 정화라는 명목으로 부랑자들을 강제로 수용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시립갱생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당시 부랑자가 아닌데도 끌려가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피해 남성의 육성 증언으로 60년 전의 그 실상을 탐사M에서 파헤쳐봤습니다.
강재묵 기자입니다.
【 기자 】
나란히 대열을 맞춘 남성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 역시 다양합니다.
갱생(更生), 새 삶을 산다는 의미의 갱생원에 이들은 어떤 이유로 들어오게 된 걸까요?
▶ 스탠딩 : 강재묵 / 기자
- "'갱생원'의 역사는 올해를 기준으로 약 6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이른바 부랑자 수용시설이던 '서울시립갱생원'은 언뜻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감도는 바로 이곳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설립됐습니다."
설립 시기는 1961년, 서슬퍼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취재진은 당시 갱생원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인물들의 추적에 나섰습니다.
각종 시민단체를 통한 피해 사례부터 일반 SNS까지, 수소문 끝에 부랑자 수용시설을 조사 중인 한 서울시 의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인터뷰 : 서윤기 / 서울시의원
- "갱생원 말 그대로 들어와서 삶을 갱생해서 나간다는 시설이었어요. 집단적으로 강제수용 됐었던…."
서 의원을 통해, 당시 갱생원에 입소했다가 나온 74살의 김춘섭 씨를 경기도 안양에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50년 이상 넘어서일까.
김 씨의 인터뷰는 가명이나 익명 처리 대신 실명과 얼굴을 모두 공개해 진행됐습니다.
3년간 수용생활을 했던 김 씨는 55년 전인 1966년 입소 당시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 인터뷰 : 김춘섭 / 서울시립갱생원 강제입소 피해자
- "한 세 명 사복 입은 사람이 나오라 해서 왜 그러시냐고 하니깐…. 거기 가니 여러 명이 또 쪼그려 앉아있어요 잡아가지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그 곳에서 김 씨는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겼고, 당시 수용자들이 죽어나가는 상황까지 증언했습니다.
▶ 인터뷰 : 김춘섭 / 서울시립갱생원 강제입소 피해자
- "냉장시설이 되어 있어서 오래 보관하는 데가 아니기 때문에 죽어 나가면 아침에 파란 열 십자 그려진 탑차가 와서 실어갑니다."
매일을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실려나가는 시신들 역시 부지기수였다는 게 김 씨 증언입니다.
갱생원 설립 당시 설치 조례입니다.
'거리를 방황하거나 노숙하는 부랑인을 직업보도 한다', 직업교육을 시킨다는 의미인데, 김 씨는 노숙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 인터뷰 : 김춘섭 / 서울시립갱생원 강제입소 피해자
- "아마 누가 물어보면 부랑아 잡아다가 수용했다 얘기할 걸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우리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전혀…."
김 씨가 처음 배정받은 방 정원만 20명.
수용자가 넘칠 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방을 사용했습니다.
▶ 인터뷰 : 김춘섭 / 서울시립갱생원 강제입소 피해자
- "2~3천 명 된다고 안에서 그런 소문들이 들렸어요. (우리가) 현황판은 알 수도 없는 거고."
▶ 스탠딩 : 강재묵 / 기자
- "당시 자료입니다. 1963년 기준으로, 수용인원의 70% 이상이 직업이 있다고 답했고, 50%이상은 경찰에 의해 끌려왔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들의 설명대로라면 노숙·부랑 여부와는 관계없이 끌려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울시 산하였던 시립갱생원.
당시 서울시 소속 공무원을 통해 시대 상황 설명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감사과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조성린 씨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조성린 / 당시 서울시청 근무
- "부랑인들이 많이 다니면 외국인들한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어디 수용을 하자, 시설을 만들고 부랑인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강제로…."
1975년 발표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
과거 형제복지원 등 피해자들을 강제입소 하는데 근거가 된 조항입니다.
부랑인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표현도 불분명하거니와 그 대상도 명확하지 않아 무분별한 수용의 빌미가 됐습니다.
앞선 피해자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시기는 60년대.
이 같은 무분별한 근거조차 없던 당시부터 강제입소는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강제 수용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진상 규명은 어느 정도 진행 중일까?
2기 과거사위원회가 진상 규명에 나선 형제복지원 사건이 최근에야 진척이 되고 있지만,
그나마 약 25억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국가의 강제조정 결정이 최근 결렬되기도 했습니다.
▶ 인터뷰 : 한종선 / 형제복지원 피해자 생존자 모임 대표
-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피해 생존자들의 피해 사실 조사 의뢰…."
그러다보니 부랑자 수용시설인 시립갱생원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은 이제 걸음마 단계 수준에 불과합니다.
▶ 인터뷰 : 이재승 / 진실화해위원회 2상임위원장
- "대부분의 극단적인 인권침해 시설들이 많이 폐쇄가 돼서 원래 자료가 없는경우가 많아 (어려움이 크고), 결국에는 피해 생존자가 살아계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증언을 정확하게 들어서…."
피해자 김춘섭 씨의 첫 인터뷰 증언과 주변 정황으로 봤을 때, 시립갱생원의 수용자는 수천 명으로 추정됩니다.
부랑자로 몰려 강제 수용됐다가, 부역과 같은 고생 끝에 죽어야만 지옥을 나가야 했던 이름 모를 피해자들.
시립갱생원의 가슴 아픈 과거,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탐사M이었습니다.
강재묵 기자, 이시열 기자 [mook@mbn.co.kr, easy10@mbn.co.kr]
영상취재 : 임채웅·배완호·김회종·김영진·이동학·김진성 기자, 김형균·이형준 VJ
영상편집 : 박찬규
그 래 픽 : 김근중
자료제공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