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이 지난 3일 자신이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서울 은평구 소재 하나고 1층 로비에서 사진 취재에 응하고 있다. |
지난 3일 하나고등학교에서 만난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첫마디를 꺼냈다. 중국 민생은행 고문으로 초빙돼 4일 출국한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가 사전에 인터뷰 약속을 하고 찾아갔지만 그는 세간의 소문이 부담스러웠는지 질문 하나마다 신중을 기해서 답했다.
50여 년간 한국 금융계에 몸담은 산증인으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을 해달라는 기자 요청에도 고민을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어렵사리 꺼낸 첫마디가 "(내가 얘기를 하면)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였다. 최근 그를 둘러싼 의혹들이 제기되는 상황을 보면 조심스러워하는 김 전 회장 행동이 이해가 될 만하다. 2012년 초 하나금융 회장직을 사퇴했지만 지난해까지 김 전 회장이 하나금융에 대해 '막후 경영'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는 이런 오해 때문에 그나마 맡고 있던 하나금융 고문직도 오는 3월 그만둘 계획이다.
김 전 회장은 앞으로 민생은행 고문을 맡아 한국 금융 노하우를 중국에 전파하는 중대한 일을 담당하게 됐다. 그는 "중국은 이제 금리 자유화를 앞둔 상황에서 금융시장이 급변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변화 속에서 내가 가진 노하우를 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선 한 달여 동안 민생은행 직원들과 직접 토론을 하며 발전 방향을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그 뒤에 정식 고문으로 활동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하나금융을 막후에서 경영한다'는 소문이 부담스러워 중국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추측한다. 게다가 오는 3월 하나ㆍ외환은행장 인사를 앞둔 상황에서 인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김 전 회장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회피했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금융인으로서 자신의 제1 원칙이 바로 '정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은행장으로 근무했던 시절부터 항상 사표를 지니고 다녔다"며 "의(義)에 맞지 않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어떤 의혹에도 떳떳함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에게 한국 금융 문제점에 대해 묻자 '금융계 공익성'을 지적했다. 김 전 회장은 "금융산업이 그동안 비난을 받은 것은 공익적인 성격에 대해서 고려를 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지나친 인센티브 등도 분명 문제가 있었고 금융계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 성격상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지원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기존 영업활동을 충실히 하면서 사회공헌을 포함한 공익적인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내내 조심스럽던 그는 하나고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하나고 학생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이미 소문이 나 있다. 개별 학생 이름을 외우고 있을 정도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하나고 졸업생들과 밤늦게까지 인터넷 채팅을 하며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올해 새해를 맞아 졸업생 16명을 직접 집으로 초대해 떡국을 같이 먹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단순히 명문대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며 "어느 대학을 가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후학 양성에 큰 열정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김 전 회장은 "나는 금융인으로서 참 많은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라며 "이제는 내가 받았던 것을 베풀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 "금융경쟁력 원천은 인재와 경쟁"
"금융은 사람이 전부이고 경쟁력은 경쟁을 통해서만 길러집니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 금융계는 늘 '국내에서 이자 장사만 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혹평에 시달려 왔다. 경쟁력을 키우고 해외로 나가서 돈 벌어오게 하겠다며 금융감독당국 정책이 끊이지 않았지만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50여 년간 한국 금융을 경험한 김 전 회장은 '인재'와 '경쟁'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규제 완화, 정부 지원, 시스템 등도 중요하지만 금융 경쟁력에는 무엇보다 인재 육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 전 회장은 "금융인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며 "외국 투자은행 실력은 100년 넘는 역사를 통해 길러진 인재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장기적 관점에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금융은 머리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며 "실제로 금융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후배들 중에 좋은 금융인이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이 많다"며 "이들이 해외로 나가 현지화하고 경험을 쌓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 금융을 승리로 이끄는
김 전 회장이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경쟁력은 경쟁을 통해서만 배양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정부가 금융사를 끌고 갈 수는 없는 것"이라며 "냉혹한 시장에서 금융사들이 자립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환경과 경쟁력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규식 기자 / 안정훈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