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인과 사별한 나정리 씨(78·가명). 아련한 추억을 되새겨온 나 씨는 이태 전 수술 여파로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올해 초 재산정리를 마음먹었다.
세 자녀에게 1:1:1의 비율로 법정상속이 이뤄지면 그만이었지만 집도, 변변한 직업도 없는 막내아들과 막내아들의 늦둥이 손녀가 걱정이었다. 최근 경기불황으로 사업이 어려워진 장남 역시 눈에 아른거렸다.
경기도 소재 전용면적 84㎡ 아파트(6억원 상당)와 생명보험(2억원)을 제외한 나 씨의 재산은 현금 7억과 월 100만원의 임대수익이 나오는 오피스텔(3억원 상당)이다. 현금과 오피스텔로 두 아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딸이 재산문제로 두 아들 내외와 얼굴을 붉힐까 두려웠다.
지난 설명절 때 재산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2명의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언장을 작성하고 유언공증을 하는 방법도 모르지 않았지만 자신을 앞세워 이 세상을 등진 친구들의 자녀 소식을 듣고 이마저도 접은 나 씨다. 유언장대로 3000만원의 현금을 찾으려 한 장남이 동생들에게 동의서와 인감증명서를 달라고 말하지 못해 쩔쩔맸다는 후문을 들었다.
나 씨는 이달초 KEB하나은행 신탁부에서 운영하는 ‘리빙 트러스트(Living Trust)’ 센터를 찾아 신탁계약이라는 대안을 찾았다.
나 씨를 상담한 배정식 센터장은 현금은 물론이고 오피스텔, 아파트 등 부동산까지 신탁기관인 은행에 맡기고 자신이 설계한 신탁계약대로 자녀들에게 자산을 배분하는 방식을 나 씨에게 제안했다.
먼저 막내아들에게는 약소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는 오피스텔을 넘기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소유권을 막내아들에게 넘기는 방식 대신 막내아들의 미성년 딸, 즉 손녀에게 오피스텔을 넘기기로 했다.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막내아들이 혹여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손녀까지 길거리로 나앉게 될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손녀가 만 30세의 어엿한 성인이 되면 오피스텔을 맡아온 은행이 오피스텔을 손녀에게 넘기기로 했다.
배정식 센터장은 “손녀가 30세가 될 때까지는 막내아들이 오피스텔에서는 임대료 수익만을 얻도록 해 아들의 노후생활도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막내아들이 오피스텔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도 방지하는 1석2조의 효과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큰 아들에게는 나 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배정’했다. 나 씨 생전에는 나 씨가 안정적으로 거주하다가 나 씨가 사망하면 신탁기관인 은행이 아파트 명의를 큰 아들에게 이전하게 된다.
부부교사로서 두 아들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를 걸어온 딸에는 7억원의 현금 중 3억원을 배정하기로 했다.
유언장을 통해 딸에게 3억원을 배정할 경우 상속비율보다 작은 현금을 상속받게 될 두 아들의 동의서와 인감증명서를 딸이 받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4억원은 기약없는 나 씨 여생의 생활비로 쓰고 남는 돈은 법정상속을 통해 세 자녀가 똑같이 나눠갖게 된다.
배 센터장은 “나 씨가 사망하더라도, 본인 생전에 작성해 놓은 신탁계약대로 신탁기관인 은행은 상속집행인의 역할을 한다”며 “현금도 직접 자녀들에게 이전하여 주고, 아파트도 신탁명의에서 직접 큰 아들로 이전해 주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나 씨 같은 평범한 경우뿐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 재산관리가 어려운 장애인인 경우에도 신탁관리가 각광을 받고 있다.
같은 센터 고객인 김현자 씨(71·가명)는 남편과 함께 평범한 가계를 꾸리고 있는 딸(45)과 장애인인 아들(39)이 있다. 자신의 사후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걱정이 많았던 김 씨 역시 센터를 찾아 신탁계약을 맺었다. 자신이 거주하는 20억원 상당의 건물은 딸에게 배정해 남동생을 보살필 유인을 제공하고 장애인인 아들에게 오피스텔을 배정해 노후생활을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들에게도 신탁계약을 통한 자산관리 유행이 일고 있다. 홍여정씨(69·가명)는 남편에게 서울 강남구 소재 빌딩을 상속받았지만 평생을 주부로 살아온 홍 씨에게 빌딩 관리는 난항의 연속이었다. 두 자녀 역시 각각 지방과 해외에 거주중이라 빌딩 관리와 임차인 관리가 어려웠다. 홍 씨는 센터 상담을 거쳐 빌딩 관리를 은행에 맡기기로 했다. 이른바 ‘부동산 관리신탁
계약 직후 은행은 연체중인 임차인 계약을 정리하고 우량 임차인 유치에 나서 공실을 줄여나갔다. 배 센터장은 “기존 임차인들도 은행에서 관리를 하는 것에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였으나 오히려 기존 임대인보다 일관성 있는 업무 처리에 큰 호응을 보였다”고 자평했다.
[정석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