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浦)라는 이름이 들어간 다른 동네와 마찬가지로 서울 개포동 역시 과거 이 지역에 진흙땅이 있어서 이름을 따왔다. 근처가 대모산 등으로 둘러싸인 데다 수리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탓에 사람이 살기는커녕 왕래도 잦지 않았다.
지금은 개포동이 부촌의 상징이지만 사람들 관심사로 떠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강남붐'도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기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강남권 대규모 서민주거단지 공급이라는 계획이 가능했다. 197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고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영개발이 이뤄졌다.
하지만 개포동 일대는 개발 후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압구정 등 먼저 개발이 시작된 지역과 달리 1970년대 오일쇼크 타격을 받으면서 사업이 한동안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등장한 택지개발촉진법에 따라 정부에 강제수용되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개포동이 다른 강남권보다 '서민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다. 강북에 있던 명문고등학교들이 잇따라 강남으로 학교를 이전했기 때문이다. 개포택지지구 내로 이동한 대표적인 명문고등학교로는 경기여고, 숙명여고, 중동고 등이 있다. 모두 1980년대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이른바 '강남8학군'이 형성되면서 개포동 일대 아파트값은 뛰기 시작했다. 개포택지지구에 일부 포함돼 있는 대치동 일대가 학원가로 조성된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1980년대 서민아파트로 지어진 이 아파트들이 올라간 집값과 주변 생활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워낙에 개포 주공아파트가 초소형으로 지어진 데다가, 노후화까지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다. 2003년까지만 해도 지은 지 20년이 넘으면 재건축이 가능했기 때문에 개포동 일대 아파트들은 1990년대 말부터 재건축을 시작하자는 주장이 계속 나돌았다. 서울시가 재건축 연한을 늘리고, 안전진단을 강화한 이유가 개포동 재건축이 과열되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개포주공아파트 재건축은 순탄하진 않았다. 조합 비리, 내부 주민 간 갈등 등 이후 서울 시내 재건축 아파트에서 볼 수 있는 문제 사례는 모두 일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속도가 가장 빨랐던 개포주공2단지(현재 래미안블레스티지)도 추진위원회가 설립된 후 16년이 지난 2019년에야 입주가 가능할 정도다.
사업 승인권을 쥐고 있던 서울시와도 잡음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소형주택 비율을 놓고 벌인 극심한 갈등이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개포2단지 등 정비계획 심의 당시 전용면적 60㎡ 이하 비율을 절반까지 늘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자 일대 주민들이 서울광장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결국 박원순 시장이 나서 '소형비율 50%는 의무가 아니다'고 밝혀 갈등이 봉합되기도 했다.
아직 개포주공 재건축 아파트 중에서 입주까지
[박인혜 기자 / 손동우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