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법 못찾는 구룡마을 (上) ◆
↑ 서울 강남구 개포동 570~600 일대 판자촌 구룡마을은 개발이익 배분 문제를 놓고 서울시와 거주민의 갈등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구룡마을 뒤로 재건축 중인 신규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충우 기자] |
주거권을 놓고 대치 중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했다. 주민 측 플래카드에는 '철거민은 개·돼지인가? 철거민의 생존권을 인정하라' '도시개발법에 어긋나면, SH지침은 찢어 없애라' 등 다소 과격한 문구가 담겼다. 반면 SH공사 측 플래카드에는 '목돈 없이도 화재로부터 안전한 주거로 이주가능하다'며 주민들 이주를 회유하고 있었다.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있는 개포동 끝자락이자 구룡산과 대모산 초입에 위치한 판자촌 구룡마을의 시간은 30년 넘게 멈춰 있다. 입구를 지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1970년대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1107가구 판자촌이 끝없이 이어진다. 언뜻 봐도 열악해 보이는 불법 건축물 곳곳에서는 노후화된 건축 자재와 수십 번 덧댄 듯한 벽지가 눈에 띈다.
서울시는 원래 개발 뒤 토지주에게 땅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는 '환지 혼용 방식'을 추진했다. 하지만 신연희 당시 강남구청장이 토지주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는 방식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자, 주거문제 개선이 급선무라며 공영개발 방식으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3년 반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전혀 진전이 없이 갈등과 대립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거주민과 토지주, 그리고 서울시와 SH공사 간에 전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룡마을 개발이 진행되려면 거주민의 이주가 우선과제이다. 하지만 공영개발 방식하에서는 토지주가 시세보다 훨씬 적은 보상을 받게 되고, 거주민은 분양권을 받기 어려워진다. 공영개발 방식으로 바뀌었어도 거주민을 이주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주민들은 구룡마을 개발 과정에서 '분양권'을 받고 싶어한다. 비록 불법 건축물이지만 지금까지 '내 집'에서 발 뻗고 살았으니 개발 후에도 이 같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개발 방식하에서 주민들은 소득 등 기준에 따라 국민임대주택 또는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지만, 임대주택 입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주민 김원신 씨는 "우리의 요구는 살 수 있는 집 한 채만 달라는 것"이라며 "특별공급 방식, 임대 후 전환 방식, 특별분양 방식 등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내 집 마련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상당수 주민은 남의 땅을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된다고 주장한다. 구룡마을 개발을 위해 상당한 기여를 해 왔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50대 최 모씨는 "한때 이곳에 투기꾼이 대거 유입되면서 거주민이 2700여 가구까지 늘어난 적이 있다"며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불법 투기세력과 싸워 1000여 가구 수준으로 줄였고, 그 과정에서 전과자와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반면 SH공사는 이곳 건물이 무허가이기 때문에 이주대책 대상자가 아니며 따라서 분양권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입장이다. 개발 보상금을 책정하기 위해 최근 진행하고 있는 물권조사에서도 양측의 시각 차가 드러난다. 거주민인 60대 박 모씨는 "SH공사가 우리의 집들을 돼지우리와 같은 공작물로 간주해서 조사 중"이라며 "SH공사가 보상금을 최대한 적게 주려고 우리를 개·돼지 취급하고 있는데, 그렇게 나오면 우리도 더 이상 협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SH공사 관계자는 "구룡마을의 집은 대부분 '주거용 무허가 비닐 간이 공작물'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주대책 대상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아예 다시 민영개발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지만 이 또한 합의점을 못 찾고 있다. 공영개발 방식에서 1989년 이전 건립 여부를 따지지 않고 구룡마을 거주민에게만 분양권을 준다면 특혜 시비가 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민영개발 방식으로 전환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강일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회장은 "공영개발 방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영개발 방식하에서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면 민영개발 방식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 요구에 따라 민영개발 방식으로 할 경우 주민들은 3.3㎡당 500만원 수준인 공사비만 부담하면 특별분양을 받을 수 있다. 투기지역인 서울에서 분양권을 받기에 주택담보대출비율(LTV) 40% 규제를 적용받지만, 감정평가액에 비해 이들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워낙 적기 때문에 전액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 20년에 걸쳐 원리금을 상환하는 조건이라면 분양권을 얻더라도 임대아파트 입주와 비슷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된다. 물론 주택담보대출을 받더라도 계약금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해서 이 부분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분양권을 요구하며 버티는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제 철거 및 이주를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면 이해당사자 간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할 텐데 이마저도 어렵다. 다행히 거주민은 서울시·SH공사와 작년 9월부터 여덟 차례 정책협의체 회의를 했지만, 토지주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서울시·SH공사 담당자를 만나지 못했다.
최근 토지주의 반발이 극에 달한 이유다. 한 토지주는 "과거에 서울시는 주거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기존 입장을 바꾸고 강남구청의 방식을 따랐다"며 "그동안 서울시와 각을 세웠던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물러난 마당에 토지주·거주민과 각을 세우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거주민도 서울시·SH공사와의 대화 자리에서 이탈할 조짐이다. 작년 9월 이후 거주민 25명으로 구성된 협의체가 매달 회의를 했는데, 거주민 입장과 SH공사 입장 간극이 벌어지면서 향후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공영개발 방식하에서 분양권 취득이 어렵다는 한계를 인식한 거주민이 협의체 참여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다.
[용환진 기자 / 추동훈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