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이제 더 이상 국민연금을 '주총 거수기'로 볼 수는 없다는 평가와 함께 지나친 경영 개입에 대한 재계 우려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내놓고 있다. 아울러 정부 입김이 강한 국민연금의 거버넌스를 바꿔야 '연금 사회주의' 등 세간의 비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의 올해 주주활동의 정점은 한진그룹에 있었다. 국민연금은 지난 2월 초 한진칼에 경영 참여를 선언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대한항공과 관련해서도 주총 전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사내이사 연임 저지를 이끌어냈다. 연임 안건이 2.6%포인트 차이로 부결된 것을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보유한 11.56% 지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울러 국민연금은 올해 주요 상장사들의 주총에 앞서 96개 상장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공개했다. 이 중 국민연금의 반대 의결권 행사에 직면한 상장사는 46개사였다. 상장사 절반가량이 반대 의결권 행사에 직면한 셈이다. 국민연금이 사전에 반대한 의안이 부결된 사례는 대한항공 1건에 불과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과거 주총과 같이 회사 측 안건에 일방적으로 찬성만 했던 데 비하면 스튜어드십 코드 이후 국민연금은 주총 거수기, 종이호랑이라는 오명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나친 경영 간섭과 그로 인해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는 향후 국민연금에 남겨진 과제다. 아울러 정부 입김이 강한 거버넌스 개혁 없이는 정부가 연기금을 활용해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연금 사회주의'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동안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 주주는 없고 정치만 있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정권이 기업 경영에 개입한 반헌법적 조치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라고 비판했다. 이어 "해외 연기금처럼 전면적인 거버넌스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국민연금도 상장사 전반에 대한 경영 개입에는 자제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날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은 투자기업의 중대하고 위법한 활동으로 기금에 심각한 손해가 난 경우에 대해서만 주주활동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것"이라며 "건전하고 투명하게 운영되는 대다수 기업은 더욱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은 재계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올해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마련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일각에서 제기된 국민연금의 한진그룹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두고 '여론 재판식' 의사결정을 내놨다는 비판을 감안한 조치다. 국민연금은 해당 가이드라인에 향후 경영 참여 대상 기업 선정 기준을 담을 예정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활용하면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구체적인 사전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사안에 따라 자의적이거나 다른 이해관계로 비치는 결정이 나올 수 있고, 국민연금에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배임·횡령 혐의에 대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조양호 회장에게는 사내이사 연임을 반대하고, 일감 몰아주기와 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는 기권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이 내놓은 주주제안이 대상 상장사 주총에서 부결된
[윤진호 기자 / 유준호 기자 / 임형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