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최종구 금융위원장 주재로 일본 수출규제 대응간담회가 열린 뒤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 은행 고위관계자가 던진 질문이다. 금융당국 수장이 "고의·중과실이 없으면 담당자를 면책하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원들은 "충분하지 않다"며 '서면 문서'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금융감독원은 해당 내용을 명시한 공문을 각 은행들에 발송해야만 했다. 이는 '면책'을 둘러싼 금융당국과 금융회사 간 커다른 인식의 간극을 보여준다.
면책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금융당국이 면책제도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은행들이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혁신금융산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면책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금융회사들의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체질까지 개선하겠다는 게 금융당국 의지다.
이는 은성수 금융위원장 후보자의 개인적인 소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는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수출입은행장을 지내는 과정에서 '면책 문제'를 직접 경험한 바 있다. 은 후보자는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금융산업이 정체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은행장을 해보니 마지막에 걸리는 부분이 책임 문제였다. (금융사가) 책임지지 않을 일만 하려는 경향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청문회 모두발언에서도 "금융권이 기업의 혁신과 도전을 장려할 수 있도록 현행 면책시스템 활용 전반에 대해 살펴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면책은 최근 금융당국이 정책을 발표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일본 수출규제 피해기업 지원 사례뿐 아니라 '금융회사의 핀테크투자 등에 관한 가이드라인'(9월 4일), '금융감독 혁신방안'(8월 12일), '혁신적 금융서비스 시범운영을 위한 지정대리인 지정'(7월 19일) 등 정책 발표에서도 '면책'이라는 단어가 매번 언급됐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회사들이 움직일 유인을 주려다 보니 '면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은 면책시스템 개편과 관련해 우선 감사원의 '적극행정면책'을 벤치마킹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적극행정면책은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감사원에 사전질의를 하면 이것이 면책이 되는지를 사전에 판단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사전컨설팅'이다. 이와 유사하게 은행 직원들이 은행에, 혹은 은행이 금감원에 면책 해당 여부를 사전에 질의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은행이 움직일 유인을 줄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은행들은 여전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다. 특히 감사원 감사도 받아야 하는 KDB산업은행·한국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책임 소재에 더 민감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특정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 혹은 특정 기업의 매각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은 결국 은행들이 책임을 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은행들에도 '학습효과'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면책만으로 은행들 행태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감원은 2014년 금융회사 임직원들의 '보신주의'를 차단한다는 취지에서 여신면책제도를 개편했던 바 있다. 당시 금감원은 제재 대상을 명확히 하고, 열거된 사유 외에는 모두 면책을 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정 체계를 전환했다.
그럼에도 은행들이 여전히 몸을 사리는 것은 금융사들의 내부 인사평가제도인 핵심성과지표(KPI)의 영향도 있다는 지적이다. 대출이 부실로 이어지면 내부 인사에서 좋지 않은 평
금융당국은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면책시스템을 개편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들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인을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승진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