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기계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을 구입해야 하는데 캐피털사들은 현재 1개월 만기 대출만 가능하다고 하네요. 우리 같은 생계형 사업장에 돈을 빌려주는 곳은 아예 씨가 말랐습니다."
중소형 캐피털사의 주요 자금 조달 창구인 여신전문금융회사채(여전채) 발행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영세기업과 1인 사업자 등이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채권안정펀드와 신용보증기금 유동화회사증권(P-CBO)과 같은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이들 캐피털사에는 그림의 떡이다.
22일 여전업계와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3조원 안팎 발행됐던 여전채가 최근에는 1조원대로 뚝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기 전만 해도 여전채(AA-~A- 등급) 발행액은 1월 3조4160억원, 2월 3조2280억원으로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3월 2조6450억원으로 감소세를 보이더니 이달에는 19일 발행분까지 1조1850억원에 그쳤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신용등급 A와 A- 등급 여전채 발행 상황이다. 1월과 2월 각각 3460억원, 3780억원으로 정상 발행되던 A~A- 등급 여전채는 3월 1550억원으로 절반이나 급감했다. 4월에는 610억원으로 떨어지더니 지난달 410억원, 이달에는 50억원으로 사실상 거의 발행되지 않는 수준까지 내려앉았다. 업계에서는 지난달과 이달 발행된 효성캐피탈과 한국캐피탈 여전채를 모기업인 효성과 군인공제회가 각각 인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5월부터는 A~A- 등급 여전채 발행이 사실상 중단됐다는 얘기다.
이들 등급 여전채가 발행되지 않는 이유로는 아직도 시장에 불안 심리가 남아 있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정부가 채권안정펀드의 회사채 매입 대상을 신용등급 A+ 이상으로 정하면서 이보다 등급이 낮은 회사채는 '정크 본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운용사로서는 조금이라도 금리를 더 주는 채권을 편입하기를 원하지만 정부의 채안펀드가 투자 대상에 대한 가이드라인처럼 굳어지면서 저등급 여전채는 외면받고 있다"며 "최근 여전채 시장에 변동성이 큰 것도 운용사들로 하여금 보수적인 투자를 가져가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 직접 소화되기 어려운 A~A- 등급 여전채를 위해 정부가 P-CBO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많은 회사들이 여기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는 분위기다. 최근 P-CBO를 신청한 한국캐피탈은 시장에서 만약 여전채가 발행됐다면 약 2.5% 금리로 조달할 수 있었던 자금을 최대 1%포인트나 더 주고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P-CBO 구조상 부실 부분을 따로 모아 놓은 후순위채를 0.7% 인수하고 제반 발행 수수료도 0.2~0.3%에 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상적으로 여전채 발행 시 이들 업체에 대한 가산금리가 올라가거나 향후 신용등급이 더 낮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여건이 되는 업체들은 P-CBO를 아예 외면하는 분위기다.
금융감독당국의 깐깐한 건전성 규제도 중소형 캐피털사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 90일과 1년 기준 유동성 자산·부채 커버리지를 모두 100% 이상으로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90일 이내 또는 1년 내 만기 도래 차입부채 대비 즉시 가용 유동성 비율을 100% 이상으로 유지하라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일정 기간 돌아오는 부채보다 현금을 그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채 시장이 정상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돈을 빌려주면 커버리지 비율이 100%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중소형 캐피털 상당수가 유보 현금이 많음에도 대출을 할 수 없는 처지다.
A등급 이하 여전채 발행 중단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는 곳은 소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는 영세 기업과 중장비 등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1인 사업자 등이다. 5년 만기로 굴착기 구입자금으로 1억원가량을 빌려주던 모 캐피털사는 최근 해당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대신 대출 한도를 대폭 낮추고 만기도 1개월로 줄인 상품만 제한적으로 운영 중이다. 또 기준금리는 제로 금리를 향해 가고 있지만 이들 캐피털사 대출금리는 반대
평균적으로 굴착기 대출은 코로나19 사태 이전만 해도 연 6~7% 금리로 받을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8~9%, 심지어 10%대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승훈 기자 / 한상헌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