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엘리트 은행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98년, IMF외환위기를 겪은 후 '명예퇴직'은 한동안 금기어로 여겨졌다. 퇴직 앞에 붙은 '명예'는 빛바랜 수식어일 뿐 쫓겨나는 자의 '쓸쓸한 퇴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올해 코로나19로 촉발된 비대면 거래 일상화는 은행권에 서슬 퍼런 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비대면 거래가 늘면서 점포 방문자 수는 급감했다. 올해만 시중은행 점포 250개가 문을 닫았다. 과거의 감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꺼내든 고육책이었다면 요즘은 정례화 경향을 띤다.
◆ 은행권에 부는 '감원' 칼바람 = 농협·SC제일·부산·경남은행에 이어 우리은행도 명예퇴직 절차에 착수했다. KB국민·신한·하나은행 등 다른 시중은행들도 연말이나 내년 1월께 명퇴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은행은 만 54세(1966년생) 이상자를 대상으로 명퇴신청을 받고 있다. 조건은 36개월치 급여를 일시에 지급하고 자녀 2인까지 1인당 최대 2800만원, 재취업 지원금 3300만원, 여행상품권 300만원 등을 지급한다. 또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만 55세(1965년생)에 대해서도 24개월치 급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명퇴신청을 받고 있다.
농협은행은 지난달 26~30일 명퇴작업을 완료했다. 만 56세 이상 대상자에게 28개월치 임금(임금피크제 임금 기준)을 지급하고, 전직 지원금(4000만원)과 농산물상품권(1000만원)을 제공키로 했다. 지난해 신청자(356명)보다 147명이 늘어난 503명이 몰렸다.
SC제일은행은 지난 2일까지 직급에 따라 최대 38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고 자녀 학자금 최대 2000만원과 창업지원금 2000만원 등을 제공하는 특별퇴직 신청을 받았다. 대상자는 상무보 이하 전 직급 중 만 10년 이상 근무한 만 55세(1965년 이전 출생) 이상 직원이다.
부산·경남은행은 만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최대 40개월치 임금을 명퇴 위로금으로 제공할 방침이다. 아울러 경남은행은 37개월치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대리급 이하 젊은 직원들의 명퇴 신청도 받는다.
은행권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디지털전환에 속도가 붙으면서 조직 슬림화 작업이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연초까지 희망퇴직에는 약 1700명이 신청했는데 올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는 비대면 거래가 많아지고 있는데다 은행들의 지점 통폐합 속도도 빨라져 명퇴 규모가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 '1주일에 5개 점포 폐쇄' 갈 곳 잃은 은행원들 = 코로나19로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붙이는 은행들이 점포 수를 대폭 줄이고 있다. 점포 수 축소는 행원 수 감소로 이어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기준 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4대 시중은행과 부산·경남·대구·광주·전북·제주은행의 영업점 104개가 폐쇄했다. 이에 은행 영업점 수는 지난해 말 4460개에서 올 상반기 4356개로 줄었다. 금감원은 올 하반기 146개의 점포가 추가로 폐쇄될 것으로 추정한다. 올해만 250개의 점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1주일에 5개 꼴로 없어진다는 얘기다. 지난 2019년 41개, 2018년 38개 지점과 출장소가 줄어든 것과 견줘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로 비대면 수요가 크게 늘고 영업점 방문 인원도 감소하자 점포 폐쇄 규모를 확대하는 모습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이 불가피한 선택인 만큼 각 은행에서는 어떤 지역의 점포를 정리하고 통폐합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다"면서 "일련의 변화들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거대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울고 싶다'는 명퇴 은행원의 하소연에 일부에서는 "(회사에서) 거액의 위로금도, 재취업 교육도 시켜주는데 뭐가 문제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말 연초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명퇴자 대부분은 제2의 인생에 무방비한 상태다. 나이가 들어 재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경기침체와 최저 임금 인상으로 창업 또한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명퇴자 대상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해도 퇴직 후 경제활동 수단을 찾는 건 전적으로 개인 몫이라는 설명이다.
A은행에 다니는 K모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이 악물고 버텼는데 디지털 전환 앞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3년치의 연봉을 위로금으로 주는데 기회를 놓치면 이것도 못 받을 수 있어 몇 번을 고민했다"면서 "하지만 유명 프랜차이즈는 이미 포화상태라 신규 출점이 어렵고, 신도시에서 가끔씩 나오는 점포 자리는 대기자만 수십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듣보잡' 프랜차이즈는 바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검증이 안된 상황이라 창업했다가 '홀랑 망하기'라도 하면 남은 인생은 빚만 갚다가 끝날까봐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전문성을 겸비한 은행원을 활용하려는 금융사와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 관계자는 "금융 퇴직
[류영상 기자 ifyouare@mkinter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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