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 1녀 중 장남으로 리더십이 뛰어나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말았다는 어린 시절의 정윤호 대표. 특히 그의 이런 성격은 예체능 쪽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은 17살이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종로에서 구두 공장을 하시던 큰 아버지 댁을 방문해 구두 공장 안을 보게 되었는데 가죽으로 구두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제 손재주를 살려서 일할 수 있는 곳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제 꿈을 ‘구두 공장 사장님’이라고 정하고는 큰 아버지 구두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공장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가죽을 가공하는 방법을 익히고 배워나갔습니다. 모두가 퇴근하고 난 텅 빈 공장에 홀로 남아 가죽을 만져보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고, 1년 남짓 구두 공장에서 일을 한 그에게 ‘구두 판매직’이라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명동에 구두를 파는 매장이 많았는데 구두 공장에서 일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판매직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구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 보니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구두를 맞춤 제작해주고 또 판매하는 것이 수월했습니다. 고객들도 처음엔 반신반의 했지만 막상 저에게 주문한 구두를 신어보시고는 모두 만족해하셨죠. 그래서인지 다른 판매 직원들보다 구두를 두 배, 세 배 더 많이 팔 수 있었고 일본에 가서 일해보라는 지인의 제안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떠난 그는 가방과 구두를 만드는 가죽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력을 계속 쌓아갔고 우리나라에서부터 경험한 것이 큰 장점으로 발휘되어 일취월장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가죽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익히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휘권양행’이라는 가방 공장을 차리게 됩니다.
“일본에 OEM 생산을 해주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쌓아온 인맥 덕분이었죠. 공장은 매우 잘 돌아갔습니다. IMF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도 일본에 OEM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직원의 수도 점점 늘고 공장도 큰 곳으로 이전을 하면서 꽤 큰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브랜드 ‘호미가’를 부착한 가방을 생산하면서 그는 다시 일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산’을 반기지 않았고 일본 백화점 입점을 모두 거부당했습니다. 그러자 오기가 발동한 정윤호 대표. 차별화된 가방을 만들어 꼭 입점에 성공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이었습니다. 악어가죽은 참 다루기가 까다로운 가죽이어서 가공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악어가죽으로 가방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전 세계에 몇 없었죠. 이 악어가죽으로 가방을 만들기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악어가죽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한 장에 50만 원이나 하던 악어가죽을 하루에 15장을 써가며 악어가죽 가방 만들기에 몰두했지만 실패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OEM 생산으로 벌어놓은 돈을 거의 다 잃게 되었고 그는 큰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비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고 있자니 그는 간절함이 몰려왔고 그 간절함으로 다시 한 번 심기일전, 악어가죽 가방 만들기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무려 6년의 시간을 쏟아 부어 악어가죽 가방을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판매에 들어갔습니다.
“해외 명품 브랜드는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가격이 비싸집니다. 관세나 부가세 등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 ‘호미가’는 이런 가격의 거품을 모두 뺐습니다. 또 빠른 사후 관리
아직도 가방 디자인만큼은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다는 정윤호 대표. 구두 공장 사장님을 꿈꾸던 그가 현재 연 매출의 100억 원 CEO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7월 20일 ‘정완진의 The CEO’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