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금메달’입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양궁은 금메달을 안 따면 이상하다 싶을 만큼, 세계 최강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스포츠 종목이 됐습니다. 하지만 양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양궁의 수준은 세계 중위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한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국내 최초의 양궁 국가대표선수 출신이자, 한국 양궁 국가대표 코치, 감독 출신인 윈엔윈(주) 박경래 대표입니다. 무려 40년 간 ‘양궁’으로 외길인생을 걸어온 박경래 대표는 현재 양궁제조업체 CEO로서 경기용 활 시장에서는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어떤 시련과 성공 비결이 녹아 있을지, MBN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박경래 대표를 만나보았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 아 래 -
Q. 사업 얘기 이전에 국가대표 감독 시절 이야기부터 해보죠. 정말 대단한 기록들을 가지고 계시던데요. 1985년 세계 선수권대회 금메달,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8년 올림픽 금메달, 1991년 세계 선수권대회 금메달....대표님이 국가대표팀을 맡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 양궁이 세계 중위권 수준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양궁 수준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셨던 비결이 궁금한데요.
운이 좋았습니다. (웃음) 당시는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고, 양궁인 전체의 기대감도 굉장히 큰 시기였기 때문에 선수들도 보다 더 집중된 훈련을 할 수 있었죠.
특히 198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4년 연속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을 꺾었던 것은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도 물론 그랬지만, 그것을 계기로 선수들도 굉장히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계속해서 세계 정상을 유지하게 된, 굉장히 큰 원동력이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최초로 양궁을 접하고,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
최초로 양궁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무렵이었습니다. 당시는 소년체전, 전국체전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시기였는데, 그때 양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실 처음엔 양궁 선수가 되겠다는 다짐보다는 ‘취미 삼아’ 해보겠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74년에 열렸던 전국 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6개나 갈아치우면서 양궁선수로 진로를 바꾸게 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돼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도 받았죠. 그런데 당시 남자 양궁팀의 세계대회 진출이 무산되면서 선수 생활은 시작도 하기 전에 위기를 맞게 되는데요. 세계대회에 진출하지 못하면, 선수로서는 생명력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그때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없다면 세계적인 지도자, 감독이 되어보자 해서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Q. 감독으로 활동하시면서 한국 양궁을 세계 1등자리에 올려놓으시고, 현재는 활 제조업체로서도 세계 1등을 꿰차고 계시다고. 창업에 뛰어든 계기도 궁금합니다.
85년 세계 선수권대회,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 국가대표 남자팀을 맡으면서 금메달을 이끌고, 1991년에는 남녀 총 감독을 맡으면서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냈죠. 감독으로서는 정말 최고 전성기의 시절을 누렸던 때였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세미나도 다녔죠. 한국 양궁의 성장 비결이 뭐냐, 이런 것들이 세미나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없다면, 세계적인 감독이 되자.’라고 마음먹었던 그 시절에 정의를 내린 게 하나 있어요. ‘세계적인 감독’이란 양궁 최강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요. 그런데 1990년대에 제가 꿈꾸던 목표를 달성한 겁니다. 갑자기 공허함이 밀려왔어요. 또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활’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휩쓸고 있었지만, 선수들이 쓰는 활의 대부분이 미국산, 일본산이었거든요. 하지만 한국산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들어보자고 결심한 겁니다.
Q. 지금이야 인정받는 기업의 CEO가 되셨지만 창업을 처음 결심하셨을 당시만 하더라도 감독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고,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창업에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요? 힘들지 않았나요?
활은 어떤 구조를 가져야 되고,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선 선수, 감독을 거치면서 잘 알고 있었는데 막상 창업을 하려고 하니 막막한 겁니다. 만드는 방법에 대해선 전혀 몰랐으니까요. 처음에는 재료부터 공부했습니다. 어떤 재료로 활을 만들어야하는 지에 대해서부터요. 그 다음에 설계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일본, 미국을 다니면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어쨌든 힘들었지만 고생 끝에 2년 만에 활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죠.
Q. 왜 실패했나요?
활의 날개에 금이 가는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날개는 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날개에 금이 갔으니 정말 치명적인 결함이었습니다. 5억 원을 투자해 창업에 뛰어들었는데, 정말 쫄딱 망할 위기에 처한 것이죠. 판매했던 활은 모두 회수했고, 모두 환불 처리해주었습니다. 통장 잔고가 0이 될 정도였으니, 타격이 컸습니다.
Q. 첫 실패 후,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나요?
사실 다시 도전하기까지 심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실패하면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는 절박함이 저를 다시 도전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생산라인도 교체하고, 설계부터 활 재료까지.. 모든 것을 다시 원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서서히 좋은 품질의 활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Q. 대표님 때문에 일본의 야마하가 양궁사업부를 철수하고, 또 작년엔 100년된 미국 양궁 제조업체마저 이겨버렸다고?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끊임없는 연구 개발이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기술 개발을 멈춰버리면, 달리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넘어져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차별화된 핵심역량을 가지기 위한 개발을 꾸준히 해왔고, 그것이 지금 경기용 활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카본 기술, 나노 기술 등을 적용한 활을 만든 것도 저희가 최초니까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세계 1등 ‘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 개발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또 이렇게 활을 제작하면서 쌓은 각종 소재 융합기술을 응용해서 ‘카본’ 소재로 만든 자전거도 출시할 예정입니다. 최근 자전거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자전거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Made in Korea’ 제품이 하나도 없는데요. 국내 최초의 ‘Made in korea’ 자전거로 다시 한 번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치고 싶고요.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스포츠 위상이 세계적이지 않습니까. 모든 종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포츠 용품 산업은 매우 낙후되어 있는 편이기 때문에, 향후에는 자전거 이외 다른 스포츠 용품에도 도전을 해서 명실 공히 우리 스포츠 위상에 걸 맞는 스포츠 용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Q.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길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저 또한 아직도 성공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만, 하면 된다는 확신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게 누구다 다 아는 얘기이긴 합니다만.. 단순하게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에 그쳐선 안 되고 가슴 속에 불을 지피면 피부 끝에서 스며 나오는 정도의 확신감을 가져야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현실로 다가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