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강하고 책임감 있고 꿈이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쓰레기'가 된 거지?”
스스로 통제가 안되는 인생의 급류에서 우선 벗어나야 했다. 퀭한 눈으로 울고 있는 그에게 한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286㎞를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이었다. 답을 알길 없는 그녀는 답 없는 여정에 마음이 끌렸다. 한해 120여명만 완주할 정도로 외롭고 힘든 길. 그러나 길 위의 외로움은 진짜 삶의 외로움에 비하면 무섭지 않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와일드'는 1995년 26살의 셰릴 스트레이드가 PCT의 1770㎞를 94일간 완주한 기적같은 실화를 담았다. 2012년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동명의 자전적 회고록이 원작이다. 영화는 한 인간이 고독과 맞서 싸우는 험난한 여정을 통해 상처를 수용하고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풀어낸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별 게 없다. 셰릴이 1770㎞를 걷는게 전부다. 살갗을 태우는 사막,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 초록이 무성한 숲까지 말이 없는 풍경만 쉼없이 변한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영화는 셰릴이 홀로 걷는 여정 속에서 과거와 대면하며 싸우고 일어서는 과정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여행이 고될수록 추한 기억이 튀어나와 그를 흔든다. 적막한 밤 산짐승의 울음 소리에 깰 때면 술주정뱅이 아빠를 피해 엄마와 도망치던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발톱이 빠지고 신발 한짝이 낭떠러지로 떨어진 날이 있었다. 셰릴은 절벽에 대고"망할”이라고 외치면서 남은 한쪽도 던져 버린다. 그 절규는 자신의 전부였던 엄마가 45살에 암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신은 어디있냐”며 세상을 원망하던 분노와 겹쳐진다.
불쾌한 과거가 출몰할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고통스런 번뇌를 반복하던 그는 종착지에 도착할 즈음 깨닫는다. "그 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반복할 것”이라고.
아픔을 수용할 때 비로소 강해진다. 94일간의 인내가 끝날 즈음 "어떤 상황에서든 최고의 내가 되라”고 타이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엄마는 술주정뱅이 남편의 손찌검에 시달렸지만 1초도 인생을 부인하지 않았다. 종착지인 '신들의 다리'를 앞두고 셰릴이 주저앉아 통곡할때 관객의 마음 속에도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아픔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니까. 결국 희망은 자기 안에 있었다.
비행기에서 '와일드'를 읽은 리즈 위더스푼은 내리자마자 원작자인 셰릴 스트레이드를 수소문해 판권을 사고 제작과 주연을 자처했다. 한때의 '로코 퀸'(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은 이 영화에서 화장기 없고 헝클어진 머리로 나오는데 눈빛은 더없이 강렬하다. 그는 다음달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인생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장면이 많다. 셰릴이 해발 3000m 산을 자기만한 커다란 배낭을 메고 힘겹게 오르는 모습을 멀리서 잡은 와이드 샷은 경이롭고 강렬하다. 마침 그 위로 유려하게 흐르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는 "못 보다 망치가 되라”고 속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요”
종착점을 앞둔 셰릴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생이라는 미지의 길 위에 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선희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