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세 살 아들이 연필을 쥐고 공책 네모 칸에 글자를 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칸 안에 글자를 다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글자가 칸 밖으로 삐죽 비집고 나오기 일쑤였다. 급기야 아들은 체념한 듯 그 칸을 뭉개며 지그재그 낙서를 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화가 박서보는 “이것”이라며 무릎을 쳤다. 연필로 캔버스를 미는 ‘묘법(描法)’ 연작의 출발이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해결책을 얻지 못하던 때였어요. ‘비워야 한다’ ‘체념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얻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방법론을 모르던 때지요. 그런데 아들의 행위를 보면서 4~5년간 계속 연필 작업을 하다 보니 나만의 방법론을 터득한 셈이죠.”
단색화의 거두인 박서보(84)의 묘법은 1970년대 국내 화단에 불기 시작한 단색화(모노크롬) 운동의 중심이었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묘법:에스키스-드로잉’전을 여는 그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색(色)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었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몸부림”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최근 프랑스 파리 페로탱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열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에스키스-드로잉이란 작업을 하기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말한다. 박서보의 드로잉은 스케치 단계만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작업이자 완성된 작품과 또다른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업한 40여점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업으로 재로 잰 듯 반듯하다. 추상 회화지만 아파트 8층에서 바라본 한강 다리와 제주도 해변가에서 자동차를 타고 본 수평선 등 풍경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는 “화가는 세탁기다. 보고 느낀 것들을 세탁기라는 장치를 통해 걸러내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단색화 열풍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그림에서 비운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입니다. 이제 저는 탐욕이나 잡스러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요.
화가가 말끔히 비워낸 자리에 관람자들은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어간다. 그것이 단색화의 힘이다. 전시는 11일부터 31일까지. (02)732~3558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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