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김진선 기자] “어렸을 때는 ‘연기 잘하네’ 라는 말이 콤플렉스였어요. 정말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죠”
눈처럼 뽀얀 피부에 웃을 때는 반달이 되는 매력적인 눈, 웃을 때는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김국희는 흔히 말하는 ‘예쁘다’라는 표현도 시원찮을 정도로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을 지닌 배우였다.
그는 대학로에서 14년이나 공연한 만큼 연기에 대한 생각도 확고했고, 여유가 있었다. 김국희는 뮤지컬 ‘빨래’ ‘오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만이’ 등을 통해, 배우들 사이에서도 ‘연기 잘하는 배우’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는 지금과는 마인드가 달라서인지 관객들이 ‘연기 잘한다’라고 하면 서운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예쁘다’는 말을 하던 관객들도, 내 앞에 서면 ‘연기’에 관한 말을 하더라”라고 회상하며 웃었다.
김국희는 이어 “할머니 분장을 하고 공연하는 어느 날, 노부부가 와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오래사세요’라고 하는데, 머리에 뭔가 쾅 맞은 것 같더라.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 것 같았다”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디자인=이주영 |
김국희는 “관객들은 못 느끼겠지만, 배우들은 초연이 된 공연에 뒷배 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잘해도 본전이고, 이미 초연에 대한 첫 인상이 박혀있기 때문”이라며 “연기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연에 올랐던 배우와 엇비슷한 흉내 내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연기를 하게 되고, 따라 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데스트랩’은 작년에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기에 김국희의 선택은 쉽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런데 연출이 김지호 라더라. 내가 ‘오 당신이 잠든 사이’를 할 때 조연출 했던 그 김지호 말이다. 5년 전 ‘우리 그때까지 서로의 자리에 있으면 함께 하자!’ 이런 약속을 했는데, 그 김지호가 날 추천한 것이라니 마다할 수 없었다. 뭐든 것을 지호 연출은 믿고 시작하게 됐다. 정말 큰 한 방이었다”
잊어버릴 수도 있는 문제지만, 김국희는 “그런 약속은 다 지킨다. 대학로에 오래 있다 보니 옛날에 같이 했던 분들이 창작, 극작, 연출 등 젊은 창작 연출로 무대에 오르더라. 또 서로 간의 신뢰가 있으면, 작품 만들기 어렵지 않지 않더라”라고 말하며 첫 대본을 본 당시를 떠올렸다.
둘. 작품에 대한 높은 집중력/ “테이블워크가 최고였죠”
↑ 사진=아시아브릿지콘텐츠 |
이어 “작품 겉면에 드러나는 스릴, 자극적인 동성애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작품이다. 여러 번 보는 관객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덧붙였다.
“‘데스트랩’처럼 테이블워크(대본 리딩 전에 대본에 대해 연구)가 재밌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대본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면서 작가와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반전에 반전이 있기 때문에 대본을 보고 놓을 수 없겠더라. 가장 원초적인 얘기, 사람이 꺼내기 힘든 모습을 굉장히 재밌게 드러낸 작품이다.”
김국희는 ‘데스트랩’에 대해 설명하며 헬가와 포터가 옥식각신 하는 마지막 장면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 장면을 걷어내면 안 되는 이유도, 모든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걸 가지면 정말 죽음의 덫에 빠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이라고 말했다.
셋. 연기파 배우/ “가벼워서도, 무거워서도 안 되는 헬가 役”
김국희는 “강성진, 임철형이 자꾼 날 보면 웃는다. 무대 위에 올라가 아무 얘기도 안하고 등장해서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섰는데 웃는다. 왜 웃지?”라더니 “어느 날은 문에 끼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안 웃길 줄 알았는데, 문틈에 낀 모습을 보고 그렇게 웃더라”라고 털어놔 웃음을 자아냈다.
극 중 헬가는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다. 쉬운 캐릭터가 있을 순 없지만,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극에 환기를 시키는 줄로만 알았던 헬가는 극이 흘러갈수록 극의 반전에 큰 역할을 해 극장을 나와서까지 극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 버리는 핵심 인물이다.
김국희는 “무게감을 줘도 안 되고 그냥 날려도 안 되는 농도 조절이 어렵다. 그래서 재밌는 것 같다. 반전도 많고 극에서 가는 정확히 한 선이 있는데, 관객들이 납득을 해서도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해도 안 된다”고 말했다.
“텍스트가 헬가가 예언만 할 수 없게 짜여 있다. 또, 사이드로 빠진 듯한 대사도 아귀가 맞아, 배우로서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관객들에게 템포를 읽히면 안 되고 계속 궁금증을 자극해야 해서, 관객들의 상상, 그 바운더링을 넘어서게 표현하려고 했다. 우스갯소리로 헬가는 아무거나 해보라고 하지만, 헬가가 가진 열쇠가 있기 때문에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 많다.”
넷. 관객과의 소통/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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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있다더라. 관객들의 취향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은 극소수지 않은가. 연기에 설득력이 있다면 다수가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내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김국희는 “관객은 작품에 정말 중요한 요소 아닌가. 내가 하는 작품은 순수예술이 아닌 대중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연기가 힘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때문에 김국희가 연기하는 배역들은 친숙하다. 어디선가 있을 법한 타로 봐주는 사람, 옆집에 살 것 같은 아줌마 등 한 번 쯤 말을 나눠보고 눈을 마주쳤을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무대에서 외로울 때도 있다. 같은 무대에서 존재해도 나를 안 보는 순간이 있을 때. 그럴 땐 무대 위가 정말 끔찍하게 외롭다. 뜨겁게 사랑하는 교류하는 연기도, 무대 위에서 프로다운 연기를 하겠지만, 인간적인 심리가 없을 때는 공허한 벽이 쳐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조금 틀려도 되니, 상대 배우에게 잘 기대고, 정확하게 보고, 마음을 나누려고 한다. 연기다운 비법이 있겠지만, 공간을 믿고, 함께하는 배우들을 믿으려고 노력한다.”
김국희는 “무대 위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동생들을 보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 무대가 한 사람만 잘한다고 빛나는 것도 아니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고 마음을 털어놨다.
다섯. 인간적/ “사람이여야 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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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같았으면 좋겠다. 배우라는 직업이 특이한 것일 뿐 똑같다. 매체를 바꾸어도 똑같은 사람일 뿐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비유를 하자면 결혼을 해서 아침에 아침밥을 만들고 녹색어머니를 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하고 그런 삶이다. 내 남편과 아이가 내 공연을 보고, 평생 동안 이 일을 영유하고 싶은.”
“극 중 인물이 어디선가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판타지성이 큰 공연이라고 해도 사람이여야 통하는 것 아닌가”
‘데스트랩’의 헬가는 분명 독특한 심령술사다. 하지만 통나무집 어디에선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앞뒤 안 가리고 예언을 할 것 같이 헬가가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을 나타내는 데는 김국희의 ‘사람다움’과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무대에서 김국희스러움은 그저 시간이 흐르며 생긴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성실하고 끊기 있는 그의 노력의 결정체였다.
김진선 기자 amabile1441@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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