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연극 배우 박정자(오른쪽), 손숙. [김호영 기자] |
그 단단한 돌보다 더 굳건하게 무대를 지키고 있는 연극 대모 박정자(73)와 손숙(71)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국립극단 연극 ‘키 큰 세 여자’ 연습실에서 매일 전쟁을 치르면서 살다가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15일 만난 두 사람은 “고3 수험생처럼 열심히 대본을 공부하고 하루종일 연습만 한다”고 토로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에드워드 올비 희곡 ‘키 큰 세 여자’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인생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박정자는 알츠하이머 증세로 기억을 잃어가는 91세 할머니 A, 손숙은 그를 돌보는 52세 간병인 B를 연기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 박정자, 따뜻함과 냉정함이 공존하는 배우 손숙의 조합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병훈 연출은 “너무 좋은 배우들이 나와 연출가가 별로 할 일이 없다. 연극의 꽃은 배우”라며 두 사람을 극찬했다.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박정자는 “발가벗긴 채로 무대에 내동댕이쳐지는데, 뭐 꽃이라고. 50년 넘게 연극해왔지만 이 작품을 연습할 수록 더 어렵다. 대본 속에 숨어 있는 복병이 너무 많아 매 순간 긴장한다. 매일 홍역을 앓고 있다. 집에 돌아갈 때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 같다. 이번에 큰 산을 만났다. 넘어가야 할텐데···”라고 털어놨다.
1963년 연극 ‘상복을 입은 엘렉크라’로 데뷔한 손숙은 “오랜만에 수험생이 된 기분이다. 지난주에 8년 하던 라디오 방송을 그만뒀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박정자 선생님이 너무 열심히 해서 안 따라갈 수 없다. 미친 듯이 대본을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우리는 힘들지만 관객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연극이다. 그게 좀 억울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작품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한다. 부유한 노인 A는 자신의 육체적 쇠약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평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B는 A를 보살피면서 위로와 조롱을 넘나든다.
이 연극에서 A가 파편화되고 왜곡된 과거를 떠올리는 회상 장면이 많다. 2007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 이후 8만에 호흡을 맞춘 두 사람도 아득한 세월을 되돌아본다. 1992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처음 만나 2000년 ‘세 자매’, 2002년 ‘그 자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나’, 2008년 ‘침향’에서 동거동락했다.
박정자는 “무대에서 전쟁을 잘 치르려면 옆에 전우가 있어야 한다. ‘신의 아그네스’ 공연중에 굉장히 힘들었는데 손숙 선생이 많은 용기를 줬다. 무대에서 같이 겨룰 수 있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나에게 긴장감을 준다”며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손숙은 “너무 힘들고 배고파 연극을 안하고 싶다고 투정 부릴 때 형님(박정자)이 받아줘서 너무 감사한다. (이 작품에서 52세 간병인을 맡아) 내 50대를 돌아보면 너무 정신 없이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의 존재를 안 건 더 오래전 일이다. 이화여대 출신 박정자는 1963년 고려대 연극 ‘삼각모자’ 무대에 오른 손숙을 처음 보고 ‘참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박정자는 “손숙은 국립극단에 들어가고 나는 극단 ‘자유’에서 활동했다. 손숙이 여당이라면 나는 야당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숨가쁘게 살아왔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연습 1시간 전에 나와 대본을 읽는다. 연극이라는 공통 분모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박정자는 “연습장에 오면 행복하지. 바깥 세상 걱정 없이 오직 연극 속 인물만
손숙은 “눈 뜨면 연습장에 오고 집에서는 잠만 잔다. 한참 연습하다보니 젊은 스태프들이 불쌍하다. 우리가 밥을 안 먹으니까”라고 했다. 공연은 10월 3일부터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02)3279-2278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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