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1900년경 발행부수가 100만부에 달했던 ‘레이디스 홈 저널’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미국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잡지 고민상담 칼럼 ‘젊은 여성과의 수다’엔 1900년 전후 16년동안 15만8000여 통의 편지가 몰렸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미국 연애 풍속은 ‘방문’ 중심이었다. 딸 가진 부모가 그럴싸한 총각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문은 복잡한 이벤트였다. 초대와 방문 사이의 시간 간격은 며칠이 좋은지, 다과를 준비해야 하는지, 대화는 어떤 주제가 적절한지, 언제 집을 나와야 하는지 등 지켜야할 규칙이 제법 많았다. 이 모든 절차는 남성이 가정교육을 잘 받고 적당한 사회적 배경을 지녔는지 여성 쪽이 간보는 단계였다.
이런 관습은 초대할 집이 있는 중산층 이상 가정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와 관련해 1907년 ‘레이디스 홈 저널’엔 월급 일부를 모아 계를 만들고, 그 돈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월세 관리인의 거실을 빌려쓰는 여섯 명의 박스 공장 여공들 사례가 실렸다. “남자들에게 편한 저녁시간에 오라고 했어요. 길거리에서 만나는 건 싫었거든요.”
1890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30여년 동안 ‘데이트’라는 하층계급의 연애 관습은 중산층 이상으로 크게 확산됐다. 용어도 하층계급의 속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첫 용례는 노동자 계층의 속어 대화체를 풍부하게 사용한 시카고 출신 작가 ‘조지 에이드’가 1896년 쓴 소설 ‘아티:거리와 도시 이야기’인 것 같다. 여기엔 똑똑한 주인공 아티가 바람 피우는 여자친구에게 “다른 놈이 내 ‘데이트’를 다 가져갔겠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대개 성관계, 성매매라는 의미로 쓰였다.
저자에 따르면 데이트 관습은 두 가지가 특징이다. 하나는 ‘집밖으로 나가는’ 행위. 나머지는 ‘돈’이다. 데이트는 하층계급의 기회 결핍에서 비롯됐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변변한 집이나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 집 밖으로의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주된 연애 공간은 길거리, 댄스홀, 나중엔 영화관이었다. 데이트 문화가 확산되자 중산층 이상 많은 젊은이들도 우중충하고 비좁은 가정 공간을 탈피해 공적 장소에서 상업적 오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저자는 “대다수 여성 근로자들은 돈을 모을 여력이 상대적으로 없었다”며 “데이트에 나선 상당수 젊은 여성들은 남자가 제공하는 ‘대접’에 의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돈을 매개로 한 이성교제, 즉 데이트의 주인은 남자였고 남자가 주인으로서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20세기 초 ‘레이디스 홈 저널’에 실린 두 가지 상반된 상담 사례가 흥미롭다.
어느 젊은 남자는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같은 답을 받았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여성의 집을 방문해도 될까요? 무례하다고 여길까요?” “여자와 그 집
한 여성은 ‘여자가 먼저 놀러가자’고 제안해도 괜찮을지 물었다. 이에 조언자는 “데이트 비용을 책임지는 사람은 남자이기 때문에 데이트 신청 역시 남자가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연애할 때 남녀 권력관계가 20세기를 전후한 30여년만에 송두리째 바뀐 셈이다.
[이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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