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양준모(35)는 일본어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럼에도 지난 4월부터 5개월 동안 도쿄와 나고야 등에서 공연한 뮤지컬 ‘레 미제라블’ 장발장 오디션에 도전해 합격했다. 출국 6개월 전부터 그는 매일 북한산에 올라 일본어 가사를 달달 외웠다. 휴대폰도 없애고 연습에만 전념했다. 모든 것을 건 덕분에 일본 관객들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출신 다운 웅장한 발성은 일본 뮤지컬 배우들을 주눅들게 했다.
양준모는 “12년 배우 생활이 장발장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바꿀 만큼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교포 3세 배우 전나영(26)은 5개 국어를 구사한다. 50여년전 그의 조부는 네덜란드어 한 마디도 못 한 채 암스트레담 한국 대사관 운전 기사로 취직했다. 고달픈 이민 생활이었지만 후손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희생 덕분에 손녀는 2013년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레 미제라블’ 주인공 판틴 역으로 세계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서양 배우들 틈에서 주눅들지 않는 그의 열창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지웠다.
전나영은 “네 살 때 한국 영화 ‘서편제’를 보고 엄청나게 감동했다.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한국적 한(恨)의 정서가 내 몸에 배였고 노래할 때도 터져 나온다”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 한국 공연 새 주인공에 발탁된 두 사람을 서울 용산에서 만났다. 꿈에 그리던 배역을 만난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 소설을 뮤지컬로 풀어낸 이 작품은 1985년 런던에서 초연됐다. 지난 30년 동안 전세계 44개국 도시 319곳에서 7000만명 넘게 관람하면서 명작 반열에 올랐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장발장의 기구한 운명과 희생이 애절하고 비장한 선율에 담긴다.
양준모는 “‘영웅’(독립운동가 안중근 의거 담은 뮤지컬) 이후 캐릭터(역할)에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다. 장발장의 인생 여정이 가슴으로 이해된다. 조카를 살리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은 신을 부정하지만 주교의 도움을 받은 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고 깨닫는다. 내 인생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어 장발장을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을 잃었을 때 신을 원망했다”고 설명했다.
전나영은 “처음 한국어로 노래하게 되어 오빠(양준모)가 많이 도와준다. 한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곳에서 공연해 기쁘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2010년 혼자 한국을 여행했다. 그 때 여기서 활동하고 싶었는데 5년만에 꿈을 이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극 중 장발장은 딸 코제트를 위해 몸을 파는 여인 판틴을 구해 돌본다. 판틴이 죽은 후에는 코제트를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작은 체구에서 폭발적인 가창력을 터트리는 전나영은 순수한 판틴을 연기한다.
전나영은 “판틴도 원래 아이였다. 살면서 실수를 하게 되고 인생이 어긋난 것이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생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양준모는 “판틴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여인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나영이가 표현하는게 정말 판틴 아닐까”라고 호응했다.
그러자 전나영은 “영국에서 많은 장발장을 봤는데 준모 오빠처럼 진실하고 야성적인 장발장은 처음이다. 덕분에 내가 더 영감을 받고 열정이 생긴다. 이 작품 캐릭터들은 모두 맞서 싸운다.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다”고 말했다.
이 뮤지컬이 지난 30년 동안 롱런한 비결은 뭘까. 배우들은 묵직한 메시지의 무게를 절절하게 느낀다.
기독교 신자인 양준모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대에 선다. 이 작품에서 불행한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싸운다. 장발장은 후회 없는 결단을 내린다. 순간 순간 깨닫는게 많다”고 했다.
전나영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뮤지컬이다. 이 세상에 잔인할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지만 세상을 바꿀 여지는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변에서 죽은 시리아 아이 때문에 유럽의 난민 정책
언제나 절실한 심정으로 무대에 오르는 두 배우의 진정성이 작품의 가치를 더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은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 11월 28일부터 내년 3월 6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02)547-5694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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