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자의 젊은 시절 |
국내 미술계에서는 수년간 병석에 있는 그를 만났다고 하는 사람이 이 씨를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대한민국예술원이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지난해 2월부터 수당 180만원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에 이 씨는 반발해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예술원은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 씨는 “이런 요구가 살아있는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반발했다. 예술원도 결국 직접적으로 생사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뉴욕의 한 성당에서 극비리에 치러진 장례식에도 누가 참석했는지 불투명한 상태다. 천 화백이 낳은 자녀는 2남 2녀. 첫 남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뒀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씨다.
그림만큼이나 화려하고 다채로운 삶이었지만 논란과 미스터리로도 점철된 고단한 삶이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1940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구성의 일본화풍을 습득해 돌아와 자신만의 치밀하고도 독특한 천경자풍을 일궜다. 해방 이후 채색화는 왜색풍이라 무조건 경시하던 국내 화단에 채색화 붐을 이끌었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꽃과 여인을 즐겨 그렸으며 30여년간 다녔던 해외 여행을 통해 ‘풍물화’도 다수 남겼다. 뛰어난 글 솜씨로도 유명해 많은 에세이를 남긴 그는 문학적 감수성과 서정성을 ‘한(恨)’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으며 이혼 후 불륜, 여동생 죽음 등 굴곡진 삶이 이어졌다.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은 한국 미술계 최대 스캔들로도 번졌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를 놓고 고인은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나 미술관 측에서는 진품이라고 맞섰다. 그러자 그는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남들이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느냐”며 반발했고, 결국 붓을 들기 두렵다며 절필 선언을 했다. 그 뒤 세계 각지를 돌다가 1998년 당시 고건 서울 시장과 작품 93점과 저작권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합의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러나 딸 이 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고향인 전남 고흥에 2007년 전시관이 마련돼 작품 66점도 기증됐으나 이혜선 씨와의 갈등 끝에 2013년 모두 딸에게 작품이 반환돼 고향 주민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천 화백의 경매 최고가는 2009년 K옥션에서 거래된 ‘초원II’로 12억원에 낙찰됐다. 올해 7월 ‘막은 내리고’가 8억6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생전 화백의 개인전을 가장 많이 열었던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화백은 완벽한 배우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작품을 남발하지 않아서 데생을 제외하면 석채와 아크릴화 등 작품 수도 1000점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화단을 대표하는 유명인인 만큼 천경자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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