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울의 아들 |
하지만 내색은 금물이다. ‘인간성’을 최대한 감추는 게 생명 연장의 유일한 방법이므로. 자칫했다간 이들 역시 가스실로 내몰리기 일쑤인데, 그 주기는 대략 4개월 남짓이다. 나치는 이들이 대학살의 증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자리로 ‘악의 일상성’이 들어선 이곳, 영혼 잃은 눈빛의 ‘존더코만도’들은 저마다 헝겊으로 안면을 가린다. 그리고는 가스실 바닥에 낀 죽음의 흔적을 말없이 닦아낸다.
어느날, 사울의 눈앞에 소년의 주검 하나가 나타난다. 가까스로 가스실에서 살아 남았지만 군의관이 입을 틀어막아 끝내 숨진 아이다. 소년의 주검을 본 사울은 동공이 흔들린다. 그리고 무언엔가 이끌리듯 그 주검을 부검실에서 빼돌린다. 아우슈비츠 전반을 목숨 걸고 누비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묻는다. “당신은 랍비인가요?” 그는 유대인 장례법에 따라 소년을 묻어주려 한다. 이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면서.
25일 개봉하는 ‘사울의 아들’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하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 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지점들로 가득하다. 도처에 ‘악’이 만연하는 아우슈비츠란 지옥도에서, 인간이길 포기할 수밖에 없던 저 극한의 땅에서, 영화는 ‘최소한의 인간됨’을 묻는다. 그 하한선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려는 사울의 몸부림은 처연하고 애처롭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위를 이해 못하는 주변의 조소와 비아냥을 그는 괘념치 않는다.
“왜 산 사람은 놔두고 죽은 사람에게 연연하냐”던 다그침에는 “우린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며 일갈한다. 오직 자신이 설정한 과업을 수행처럼 몰두할 뿐이다. 그런 사울의 모습은 다소간 불편한 느낌마저 안긴다. 상식과 이성의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그러나 곱씹고 되씹은 끝에 남는 건 한 조각 부끄러움이다. ‘우리는 저 참혹한 현장에서 사울처럼 최소한의 인간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드물 것이다. ‘사울의 아들’은 그런 식으로 시대의 상처 안에다 소금을 발라댄다.
서른 여덟의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이 한 편의 데뷔작으로 차세대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제68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제7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헝가리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었다. 28일 치러지는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외국어영화상 유력 휴보로 올라가 있다. 네메스 감독은 “수용소라는 죽음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사울이 행하는 ‘죽음의 의식’을 대조시켜 인간다움의 가치를 주목하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을 향한 사울의 마지막 미소는 이 영화의 백미(白眉)다. 가깝게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자’(2016년)를, 멀게는 ‘400번의 구타’(1959년)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해석의 몫을 고스란히 넘겨준다. 생의 허무가 깃든 휴 글래스(리어나도 대카프리오)의 무심한 표정과 어린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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