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나르 베르베르 |
거인(巨人)은 새 인류를 만들었다. 평균키 170cm 피조물은 반기를 들었다. 제 살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우리의 자화상이며, 제2인류다.
제2인류는 제1인류를 제우스, 오시리스, 케찰코아틀로 기억했다. 신(神)을 창조해버린 것이다. 제2인류는 나아가 키 17cm의 ‘에마슈’를 탄생시켜 이용한다. 제3인류다.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고, 조물주가 신으로 격상되는 기막힌 역전. 문학적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궈낸 한 작가의 집념이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3인류’(열린책들 펴냄) 5·6권이 출간돼 시리즈가 완간됐다. 17m였던 인류의 키가 17cm에 이른 이야기가 4권까지 담겼다면 5·6권은 제2인류와 에마슈의 갈등을 그렸다.
베르베르는 첫 장부터 “소설책을 펼쳐 읽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20년 뒤에 이야기가 시작된다”며 ‘절대적 시간’이 아닌 ‘상대적 시간’이란 개념을 설정해 독자를 끌어들인다.
에마슈는 ‘초소형 인간(Micro-Humains)’의 대문자 M(엠)과 H(아슈)를 프랑스식 발음이다. 대테러 활동에 투입된 에마슈는 전쟁을 막는 공을 세우지만 중국의 불법복제로 대량생산된다.
제2인류의 법으로는 의식과 지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쓰임새 있는 ‘물건’일 뿐이어서 학대 당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소행성 충돌을 막으려는 에마슈에 제2인류는 오히려 기생한다.
30억명 인류 희생을 두고 에마슈의 탓을 돌리는 제2인류의 무책임함은 인간의 성악설을 떠올릴 만큼 후안무치하다. 에마슈의 통치자를 인류가 테러로 사망케 하거나 세계대전이 촉발되는 등의 인간사 갈등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특히 베르베르가 설정한 지구의 7개 진영은, 현재 인류를 국가가 아닌 이해관계의 틀에서 묵어내 전세계 인간의 삶을 비유한다. 지구는 칠각형의 체스판이고 모든 존재는 그 위에 서 있다.
은행·기업·언론 등 자본주의자(백색), 신만을 따르는 광신도(녹색), 로봇 친화적 기계주의자(청색), 광활한 우주로 도망가려는 우주론자(흑색), 불로장생을 꿈꾸는 억만장자(황색), 여성화가 세계를 구한다고 믿는 여성주의자(적색), 초소형 인간 에마슈(연보라색)로 나뉜다. 한 판의 체스는 우리가 놓인 삶의 상징이다.
베르베르는 제3인류 1권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2013년 11월 “과거 우리 인류는 진화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선택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며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은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베르베르는 ‘제3인류’ 완간을 기념해 12일 방한한다. 한국 독자층이 두터운 그가 한국을 찾는 건 7번째다.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138억년의 우주 나이를 1년치 달력으로 치환하고, 기원 후 2000년 인류사는 ‘마지막 4초’에 불과하다는 비유를 남겼다. 또 10만 광년 지름의 은하에서
시공간적 위치를 밝히는 건 이처럼 인간의 본능적 숙원이었다. 베르베르는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 위치를 끊임없이 캐묻는다.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계속 깨부수는 창세기적 우화(寓話), 베르베르에 열광하는 이유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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