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이어서일까.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꺼풀이 감길 것만 같았다. ‘아가씨’ 개봉을 하루 앞두고 밤잠을 설친 것이 분명했다. 1일 오전 10시 서울 삼청동 한 찻집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가 시작되고 몇 분이 안 되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이 명료해지려면 잠깐 일어서 있는 게 낫겠다”며 테이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주문한 치즈케익이 나왔을 땐 “같이 먹자”며 연신 포크질을 했다.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겠다는 그 몸부림이 처연했다. 너무 일찍 보자고 한 게 아닌가 괜스레 미안해졌다.
늘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 기성 관념을 뒤흔드는 독창적인 소재로 매번 세상을 놀래켰던 감독. 그를 향해 쏟아지는 찬사와 야유의 엇갈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깐느 박’이라는 별칭처럼 박찬욱은 이제 그 자체로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영화계의 파워 브랜드라는 것이다. 제5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타낸 ‘올드보이’(2003), 제62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박쥐’(2009)에 이어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가씨’까지, 그간 박 감독이 선보여 온 필모그래피에는 언제나 ‘파격’이란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유수 국제영화제에서 꾸준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박 감독은 자신의 현 위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너무나 평범한 중산층 서울 토박이었어요. 좀체 나서는 일이 없었고 리더십이랑은 거리가 멀었죠. 조용히 공부하는 인생을 살 줄 알았거든요. 근데 많은 사람을 지휘하는 사람이 된 거에요. 희한하죠. 큰 성공과 실패가 오가는 부침 많은 감독의 삶이라니. 지금도 저한텐 미스터리에요. 감독이 되었어도 고만고만한 영화들만 꾸준히 만들 줄만 알았는데.”
그는 자신을 향한 전 세계의 관심 비결이 “장르 영화의 색채가 뚜렷해서인 것 같다”고 했다. “예술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국제영화제에서는 꽤나 이채로운 존재로 여겨질 법도 하겠죠. 생각해봐요. 아예 흑백영화이거나, 3~4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롱테이크 영화이거나, 음악 하나 없는 무성영화이거나, 그런 영화들이 즐비한 가운데 비교적 장르적인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는 영화이다보니 자연 주목해주는 건 아닐까요. 내가 영화 기자라도 예술영화들만 모이는 동네에 있으면 그런 영화들이 더 관심이 갈 것 같은데.”
어쩌면 박 감독을 향해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진부함 대신 파격의 길을 택하며 모험을 감행한 건 박 감독 자신이었다. 그가 “그럴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며 말을 이었다. “사실 뻔한 걸 가지고는 안 되지 않겠어요. 어느 감독이나 그렇겠지만 관객이 뭔가 좀 더 관심 가질만한 소재를 찾아다니는 거죠.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요.”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라는 고백과 달리 정작 그의 영화들은 온전한 상업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선을 아슬아슬 오갔다.
그럼에도 그는 “예술영화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 번 해보려고 시도한 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였지만 정작 만들고 보니 아주 오락적인 영화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뼛 속 깊은 상업영화 감독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계기”라고 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이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그것도, 특별상인 ‘안프레드 바우어상’을 타냈다. 일종의 아이러니다. 그는 “사실, 잘 모르겠다”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생각하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기준과 사람들의 기준이 좀 다른것 같아요. 굳이 표현하자면 조금 예술적인 상업영화 정도라고 해야할까요.”
그의 열번 째 영화인 ‘아가씨’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상업영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답다. 기본적인 플롯 뿐 아니라 전체적인 미장센, 특히나 유려한 문어체적 대사가 독특하다. 과묵한 분위기로 일관했던 전작들과 달리 유달리 수다스럽다. 이유가 뭘까. 그는 “한국 영화엔 유려한 대사를 시도하는 전통이 거의 없다”며 “한강 소설가의 아름다운 문장들처럼 미학적인 대사를 영화 속에 충분히 접목하고 싶었다”고 했다. “물론 짧고 폐부를 찌르는, 이를테면 재미있는 욕이라던지, 그런 매력적인 대사는 많죠. 하지만 그동안 문학적이고 품위있고 돌려 말하고 중의적인 대사를 구사하는 경우는 내가 볼 때 거의 없었어요.”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와 하녀 숙희(김태리)의 고밀도 정사신에 대한 연출자 나름의 우려는 없었을까. 그는 “그런 걸 우려할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일갈했다. “동성애가 부담스럽다거나 놀랍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시대는 이제 아니잖아요. 사회 다방면에서 끊임없이 이슈파이팅을 해왔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 역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거에요. 관객들이 그리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거라 봐요. 지켜봐야겠지만, 저는 자신 있어요.”
인터뷰가 고조될 수록 박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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