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편의 시를 쓰고도 흘러가는 시인이 있는 반면, 단 몇 편의 시로도 마음의 강물에 멈춰서는 시인이 있다. 다작이나 과작이 시의 깊이를 확언하진 못하지만 시는 오래될수록 진해지는 주류의 풍미와 같다. 시력(詩歷)은 때로 시의 깊이와 비례한다. 등단 40년 안팎에 이를 만큼, 오랜 시간 시단을 이끌어온 시인들의 새 시집을 모았다.
문정희(70·1969년 등단) 시인의 ‘지금 장미를 따라’(민음사 펴냄)는 한 권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표제작은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집에서 발견한 여성의 삶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칼로의 생애를 “으깨어진 골반 위에” 세워져 “가슴 터진 석류가 왈칵 슬픔을” 쏟는 무력함으로 보았다. 우리네 여성의 삶과 닮았다.
“시간이 있을 때 장미를 따라”라는 시인의 문장은, 칸트식(式)으로 말하자면 ‘만약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하라’는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아니다. ‘무조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이다. 그래서 “지금을 즐겨라(카르페 디엠·carpe diem)”란 시어는 성별을 불문하고 인간 삶의 필요조건이 된다.
모성애와 이별의식은 고희에 이른 시인의 생을 반추케 한다. “아들아/너와 나 사이에는/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아들에게’ 부분)는 사람(人)은 결국 사이(間)와 무관치 않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너 떠나간 지/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내 피의 달력으론 십 년 되었다”(‘이별 이후’ 부분)는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을 상상케 한다. 보석같은 시 177편이 붉은 장미잎 표지의 양장본에 담겼다.
문충성(78·1977년 등단) 시인의 ‘마지막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생의 목적인 사랑, 죽음의 결과인 몰락이 뒤섞였다.
“전생으로 갔다가 후생을 만났다/거기에 현생은 없었다(중략)있는 것을 찾아보니 아무것도 없다”(‘후생(後生)의 노래’ 부분)처럼 삶의 무의미함을 툭 건드리기도 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합니까 어째서//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까 모두”(‘사라져가는 것들은’ 부분)에서 보듯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붙잡기도 한다.
표제작은 ‘내’가 ‘나’에게 추궁하는 시다. “사랑하고/때로/싸우면서/눈물이 마르도록/그 사랑 완성하지 못했습니까”(‘마지막 사랑 노래’ 부분)에서 보듯, 미완성의 사랑으로 남은 자신의 흔적을 질책한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연신 ‘했습니까’란 시어로 되묻는다. “젊은 날부터/나의 우주”였던 사랑의 질서로 편입되지 못한 옛일을 후회하는 듯싶다..
김혜순(62·1979년 등단)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펴냄)은 생사의 경계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던 시인의 기록이다. 지하철에서 ‘삼차신경통’이라는 병명으로 쓰러졌던 아픔을 겪은 김 시인은, 49편의 시를 묶었다. 마치 49재(齋)를 의미하는 듯한 각각의 시는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명제의 독백으로 읽힌다.
“소리가 떠난 세계. 만질 수 없는 평평한 세계”(‘면상-마흔사흘’ 부분)는 거울을 의미하는데, 거울은 “내면이 죽은 사람의 면상처럼 만물이 되비치는” 공간이다. “볼 수는 있으나 들어갈 수는 없는 딱딱한 표
죽음의 문턱을 밟았던 한 생이 남긴 자서전을 넘어서서, 죽음 자체가 쓴 자서전이라는 점, ‘죽음의 의인화’라는 극단까지 나아간 시집이 시인의 원숙함을 증거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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