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이 베스트셀러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어느덧 베스트셀러 명단에 한국문학이 떡하니 이름을 올렸고, 때로 절판의 낭떠러지까지 내몰렸던 한국문학 신간은 이제 ‘출간→매진→중쇄’라는 공식이 굳어지는 추세다. 한강 소설가의 첫 맨부커상 수상이란 낭보도 독자 가슴에 숨겨졌던 문학의 향수를 건드렸을 터. 1월 1일 이후 출간된 한국문학 작품은 중쇄에 돌입하며 올 상반기 문학계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22일 출판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는 한국문학의 부활한 해였다. 교보문고는 2012년 이후 평균 4%가량 감소하던 도서판매량이 올해 2% 상승으로 돌아섰고, 그 중심에서 문학이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교보문고 측은 “인기 저자의 후속작 출판과 함께 맨부커상 수상으로 도서시장에 활력이 생겼다”고 평가했다. 예스24는 전체 도서판매량 가운데 한국문학 점유율이 작년 4.9%에 비해 0.8%포인트 늘어난 5.7%로 껑충 뛰었다.
한국문학 작품의 중쇄 열기는 이같은 흐름을 증거했다.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든, 한편을 담은 장편이든 출판시장에 초판 매진 열기가 뜨거워서다.
중견·신예 소설가의 소설집은 어김없이 ‘초판 매진’ 행렬에 동참했다. “긴 말 할 것 없다”며 단편을 주로 쓴 작가들은, 200자 원고지 150장 내외의 소설로써 이를테면 ‘단단익선(短短益善·짧을수록 좋다)’의 정의를 세웠다.
소설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창비, 5월 16일 펴냄)는 술(酒)이란 키워드로 아니 취하고선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무게를 담았다. 윤성희 작가의 ‘베개를 베다’(문학동네, 4월 21일)의 소소하고 내밀한 문장으로 읽기의 즐거움을 건넸다. 두 소설집은 출간 한 달도 안 지나 재판을 찍었다.
등단 10년차의 벽을 넘으며 중쇄의 벽도 넘은 소설가도 있다. 소설가 윤이형의 ‘러브 레플리카’(문학동네, 1월 13일)는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해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김이설 작가의 ‘오늘처럼 고요히’(문학동네, 4월 4일)는 음습한 현실에 갇힌 인물에게서 거울을 보는 듯한 감정을 건넨다.
신예 소설가들도 무섭게 질주했다. 실패하고야 만 어떤 정신을 문장에 새긴 소설가 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 5월 27일)와 일상의 균열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한 최정화 작가의 ‘지극히 내성적인’(창비, 2월 15일)은 첫 소설집으론 이례적으로 가뿐히 2쇄를 냈다.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5월 31일)는 인간의 내면을 꼼꼼한 문장으로 포착해 웃고 울게 만든다는 입소문이 퍼져, 올 상반기 출간된 소설집으로는 유일한 3쇄 고지에 올랐다.
장편을 펴낸 소설가들에겐 의마지재 (倚馬之才·긴 문장을 지어내는 글재주)란 사자성어가 어울린다. 서사의 달인들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며 서점가 한국문학의 책장을 풍성하게 채웠다.
소설가 김경욱 ‘개와 늑대의 시간’(문학과지성사, 4월 15일)으로, 소리소문 없이 3쇄에 돌입해 6000부를 찍었다. 선악을 가려내지 못하는 시간이란 인간사를 비유했다. “운동화의 복원은 곧 기억의 복원”이란 명제로 망각 속 기억의 문제를 써내려간 소설가 김숨의 ‘L의 운동화’(민음사, 5월 30일),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건 안온한 일상이 아닌 균열”이라는 주제로 일상의 표정을 포착한 소설가 편혜영의 ‘홀’(문학과지성사, 3월 23일)도 서점가에 2쇄까지 5000부가 풀렸다.
노장과 거장은 동의어임을 증명한 소설가도 있다.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창비, 5월 20일)는 일본 강제징용의 암울함을 담아 한민족이란 과거 공동체를 고민했고, 윤대녕 작가의 ‘피에로들의 집’(문학동네, 2월 25일)은 한지붕 아래 모여 사는 유사(類似) 가족이란 소재로 현재 공동체를 고민했다.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행나무, 5월 16일)은 22쇄를 찍어 11만부가 팔렸다. 악(惡)의 심연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이란 통찰을 적었다. 한강 작가의 신작 산문집 ‘흰’(난다, 5월 25일)도 2만부씩 3쇄, 총 6만부가 백색 종이로 만들어졌다.
시집은 ‘구관이 명관’이었다. 경악스러운 살풍경에서 삶의 진실을 건져올린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3월 3일), 사물의 형상에서 외형을 보려 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려 한 송찬호 시인의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3월 3일)도 2쇄를 냈다. 한 시인이 ‘시의 순교자’로 추앙한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 6월 16
16세기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독서법 강론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책은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켜버리고, 어떤 책은 잘 씹어야 한다.” 소설의 문장을 맛 보고, 삼키고, 잘 씹어야 정신의 소화작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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