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행복하신가요?”
뜬금없는 물음은 상대를 긴장하게 만든다. 배테랑 배우라고 예외는 없다. 중견 배우 유해진(46)도 마찬가지. 꽤 오랜 시간 그는 답변을 망설였다. “바보같은 질문이지만...”이라고 한 마디 흘렸더니, “그럼 하지를 말지...”라며 느릿느릿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크게 보면... 저는 참... 복받은 사람이에요. 사실... 재능과 노력 만으로 다 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돌이켜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해요.”
올해는 유해진의 배우 데뷔 20주년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당시 화제작에 거의 다 출연했다. 데뷔작 ‘블랙잭’(1997) 이래 ‘주유소 습격사건’(1999) ‘공공의 적’(2002) ‘왕의 남자’(2005) ‘타짜’(2006) ‘전우치’(2009)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배테랑’(2015) 등···.
언제나 흥행영화의 복판엔 그가 있었고, 특유의 다채로운 연기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자타공인 한국의 스티브 부세미. 구수한 입담과 재치, 깐죽거림의 달인인 그는 진지한 인텔리 연기마저 능히 소화하는 만능 연기꾼이다.
“많은 것을 해볼 수 있었어요. 코믹, 멜로, 액션도 있었고….”
지난 5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찻집에서 만난 유해진은 쑥스러움이 많아 보였다. “거의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다”고 극중 배역에 대한 상찬을 늘어놓으니, “내 영화, 어떻게 보았냐”고 화제를 얼른 돌려놓는 것이었다. “아직 형욱(극 중 주인공)의 자장 안에 있어서 제 스스로 평가를 잘 못 내리겠어요. 완성도는 어떤지, 재미는 있는지….”
결과적으로 '럭키'는 볼 만한 영화다. 아무 생각 없이 '유해진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다. 카멜레온처럼 연기 색을 바꿔가는 그의 원톱 연기에 빠져들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눈녹듯 사라진다. 괜히 작품성 논하며 머리 싸멜 필요 없는, 편하게 관람하면 되는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거부 킬러 형욱(유해진)과 비루한 단역배우 재성(이준)이 황당무계한 사고로 뒤바뀐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액션과 코믹, 멜로가 형욱이란 캐릭터 안에 비빔밥처럼 버무려진다. 유해진과 조윤희(소방관 역)의 멜로 앙상블도 제법 달콤하다.
그에게 “러브라인은 어땠는지”를 묻자 돌아오는 답변은 썰렁한 아재개그였다. “S라인은 관심 없어요? V라인도 있는데 왜 자꾸 그런것만 물어봐.” 익살스레 웃는 그에게 “조윤희씨는 본인 여성관에 부합하냐”고 몰아붙이니 그는 “아유... 글쎄... 난감하네, 난감해... 그런 분이면 정말 좋겠다”며 몹시 부끄러워했다. 극 중 키스신 소감까지 물었을 땐, “NG가 몇 번 났는지 정확히 기억 안 난다. 절대로 일부로 NG내진 않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기억 상실, 그리고 뒤바뀐 인생. 극 중 소재처럼 그 자신도 누군가와의 뒤바뀐 삶을 상상해 봤을까. 그는 “그런 상상일랑 일절 해본 적 없다”며 잘라 말한 뒤,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저마다 속 안에 곪은 구석이 있는 게 우리네 삶”이라며 “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고싶다”
“배철수씨가 예전에 모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 젊은 친구가 ‘배 아저씨는 저의 젊음이 부럽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어요. 그 분이 말하길, ‘아무개씨는 늙어보셨나요? 저는 늙어봤습니다’라고 하는거에요.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는 것,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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