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창열(88)은 45년간 물방울만 그려왔다. 1972년 파리 작업실에서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들어 유화 색채를 떼내 재활용하려고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놨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 영롱한 존재에 빠져 수행하듯이 물방울만 그렸다. 스스로를 비우고 삶의 고통을 정화시켜 물방울처럼 투명해지는 무(無)의 세계를 추구해왔다.
서양화가 임동식(72)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담기 위해 고독한 투쟁을 해왔다. 충남 공주 한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누군가 "차 한 잔 끓여다드릴까"라는 말만 건네도 오만상을 찌뿌린다고 한다. 그는 "스님들의 참선처럼 그림은 나의 내부를 바라보는 것"이며 "중학교 때 가출해 스님이 되려고 했는데 부모의 반대로 화가가 됐다. 혼자 살면서 그림에만 집중하는데 전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재조명받고 있는 단색화가 조용익(83), 과일채집 시리즈 등 사실주의 회화에 집중해온 한운성(71), '숯의 화가 ' 이배(61), '붓의 화가' 이정웅(54)도 치열한 그림 수행으로 독창적인 화폭을 구축했다.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작가 6명의 최근작을 감상하는 그룹전 '코리아 아트 나우'가 열리고 있다. 지난 7일 개막해 오는 27일까지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를 기획한 이화익 한국화랑협회장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20~24일 코엑스)에 외국 컬렉터들이 많이 오는데 단색화 외에 한국 대표 미술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굳건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 6명을 선정해 국제적으로 더 알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개막식에서 만난 조용익은 2015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작품 두 점이 낙찰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단색화가. 박서보, 하종현 등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이 단일 색을 칠하고 덮는데 반해 그는 색을 비우고 지운다. 7~8번 이상 밑칠 작업을 마친 뒤 마지막 겉면에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 손가락, 나이프, 붓을 써서 밑색을 긁어내고 지우면서 균일한 형상을 연출한다.
이정웅은 큰 붓으로 한지에 먹을 튀긴 후 유화로 모필과 붓대를 극사실적으로 그려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마치 실물을 붙여놓은듯한 붓은 스스로 움직여 그림을 그릴 것처럼 강렬한 힘을 품고 있다. 싱가포르와 스위스, 스페인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미국 마이애미 세타이호텔에 15점이 걸려 있다.
2003년부터 붓을 그려온 그는 "붓 하나면 충분하다"며 "저 붓을 시켜 내가 표현하고 싶은 추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가장 큰 규모 '브러시'(198×415㎝) 작품이 걸려 있다.
이배는 숯으로 기하학적인 추상을 그리는 작가. 1990년 프랑스에 간 후 생활고를 겪었던 작가는 저렴한 숯으로 새로운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전시장에는 선을 얽혀있는 2016년작 '무제'(162×130㎝) 등이 걸려 있다.
주차장을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DL 2017-VII'은 한운성 작품이다. 2012년 서울대 회화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여행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풍광을 독특하게
자연미술을 주창해온 임동식은 '친구의 작은 텃밭' 등을 내걸었다. 많이 소유하지 못해도 전혀 불만 없이 작은 텃밭에 빠져있는 친구의 순수한 모습에 감동해서 그렸다고 한다. 작가는 "내 그림의 목표이자 발상점은 도저히 잊지 못하는, 사라져가는 풍경"이라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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