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경 작가(54)는 2011~2012년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를 간병했다. 제세동기와 호흡기에 너무 오래 의존한 어머니의 다리 살이 썩어들어가면서 뼈가 드러났다. 절망 속에 지내던 어느날 기적처럼 새 살이 돋아났다.
최근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그 모습이 새싹처럼 예뻤다"며 "최악의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생명체의 경이를 느껴 다윈의 진화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동물과 식물 모두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었으며 어느 순간 그 구분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작가는 2015년부터 동물과 식물을 교합한 새로운 창조물 '보태니멀(botanimal)'을 그리기 시작했다. 식물을 뜻하는 보태닉(botanic)과 동물을 의미하는 애니멀(animal)을 합성해 작가가 만든 신종어다. 눈과 다리가 달린 식물은 기괴하면서도 귀엽다. 풀대에 돋아난 솜털, 우주를 비추는 것 같은 반짝이는 눈알에서는 처절한 생명 에너지까지 느껴진다. 세로 40cm, 가로 30cm 한지에 그린 보태니멀 회화 100여점이 그의 개인전 '보태니멀 가든'(6월 24일까지)에 걸려 있다. 이렇게 다채로운 괴생명체를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이 그저 놀랍다.
그는 "유년 시절 집 정원에서 자라던 식물을 해부하고 놀았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식물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동물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생명체도 식물일 것 같다. 그 존경심을 작품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갤러리 지하에는 거미줄을 친 무덤 같은 대형 설치 작품이 전시돼 있다. 6개월간 은사, 군번줄(군인들의 군번 목걸이 줄), 사슬을 뜨개질한 레이스 천막이 에워싼 관에는 축축한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작가가 직접 작업실에서 길러온 이끼다.
작가는 "고통을 동반하는 사슬과 군번줄, 즉 희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그 주변에는 하늘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가는 회화 작품도 눈에 띄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위치한 아트센터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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