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태석의 그림들은 쉽게 다가오고 즐거움을 주는 친근한 그림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떤 선입관이나 부담감 없이 그의 그림세계와 접할 수 있다.
주태석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작가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현대미술이 대중과의 소통에 커다란 장애가 있는 있다는 시점에서 볼 때 주태석 그림의 매력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풍경을 만나듯 볼 수 있는 그림들. 그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보여주던 회화적 모티브는 이런 숲과 나무이다. 이 풍경들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산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자연 혹은 숲을 거부감 없이 가깝게 여기거나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보면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 해내는데 있어 어느 정도의 기술적인 묘사력과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러한 극사실의 회화 대부분의 화가들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 해 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사진이라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극사실 회화가 이들 약점을 벗어나 다르게 존재하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사진과의 차별성을 두어야만 하는 것은 포토리얼리즘과 그 작가들의 운명이다.
물론 그러한 많은 노력들이 70년대를 풍미했던 극사실 작가들에 의해서 보다 분명하게 극복되어지는 흐름이 있었고, 그 위에 마침내 한국적 극사실주의가 나름대로 정착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주태석의 최근 풍경들은 초기 <기차길> 풍경의 이미지들을 사실적으로 기록 해 놓았던 작품들과는 보다 근본적인 회화적 문제들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그 점에서 그의 근작들은 극사실 작가들의 작품세계 변모와 한 전형성을 보는 듯 하다.
그는 단순묘사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차원으로 이동해 가고 있다. 카메라가 담아 낼 수 없는 색채들을 사물의 본래의 색과 병렬하여 배치한다든가, 배경의 이미지를 회화구성에 중요한 하나의 장치로 간주하려는 노력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다양한 색채를 통하여 극사실풍의 회화가 갖는 단조로움과 분위기,구도를 바꾸려는 과정 과정이 그의 작가적 세계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주태석의 풍경들이 예술성이라는 의미를 잃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여지는 풍경들을 이처럼 독특하고 다양한 언어로 해석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뛰어난 손재주와 탁월한 묘사력에 그의 그림이 빚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의 사실성은 풍경에 대한 그만의 감수성과 독창적인 풍경으로 존재한다.
1970년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그가 보여 왔던 <기차길> 연작들은 부정 할 수 없이 60년대 후반 7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전 유럽을 휩쓸었던 극사실주의 맥락에서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일단 그가 표현 해 내는 주요 대상이 매우 사실적인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사실적 묘사를 구한다고 그의 그림이 우리들을 눈속임과 기술의 세계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고대 희랍인 화가 지우스가 그린 포도를 보고 새들이 속았다거나,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쳤다는 스타일의 기법을 그는 추구하지 않는다.
주태석은 그 자신이 본 나무의 실제성과 숲의 느낌들을 화폭에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숲을 새로운 관점으로 발견 해 내고 , 감동적인 대상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이런 변모는 자연의 한 부분을 포착하여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드러내고자하는 현대작가들의 치열한 도전과 그 의식을 같이 한다. 물론 그 이미지란 바로 숲에 펼쳐져 있는 나무와 그 숲의 정경을 담아내는 일이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나무와 숲의 관계를 가시적으로 표상 하는 일로 숲을 하나의 관념으로 묘사하는 일이다.
그의 그림에는 일상적으로 하이퍼 리얼리스트가 주창했던 전면적인 화면의 극명한 묘사가 제거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회화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주태석은 좀처럼 그의 그림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거나 머무르는 것을 경계한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이입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바람 부는 숲일 수도 있는데 한 번도 그의 숲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때가 되면 단풍도 들고 , 낙엽도 떨어지는데 . 그가 가꾸는 숲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물론 하이퍼 리얼리즘 혹은 슈퍼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화풍들이 일상적인 풍경이나 모습을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던 것에서 출발한 점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하여 보여지는 대상이나 현실 그대로의 세계만 보이려 했던, 교외에 거주하는 한 가족의 삶을 향수가 느껴지도록 그리기보다는 카메라의 이미지로 보여졌을 때의 평면화 된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처럼.
그래서 작가의 감정이나 의식이 배제 된 채 그림 속에 현실의 이미지를 냉정하게 드러낼 뿐 자신의 서투른 감정을 집어넣거나 하는 것을 배격했고 허락하지 않는다. 평면화된 효과를 더욱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흐르는 물에는 뛰어 들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 주태석은 그 숲속에 뛰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그 숲에서 그가 숨을 쉬고 숲 안을 돌아다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숲에로의 귀향이나 산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제 그는 정년을 앞두고 새로운 작가로서의 세계를 나아갈 것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