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안느(왼쪽)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다가 그를 연민하게 된다. [사진 제공 = 그린나미디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주요 등장인물인 여인 셋이 갑자기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하녀 소피가 낙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지상으로 나가기까지 뒤를 보지 않으면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주겠다는 페르세포네의 약속을 잊고, 오르페우스는 출구 코앞에서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본다. 순간의 판단 착오로 아내를 잃는 오르페우스를 하녀 소피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하자 화가인 마리안느가 말한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지." 세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는다.
↑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속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때로 죄책감을 느낀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뜬금없는 이 신은 사실 작가가 전체 극을 통해 하고픈 말을 함축하고 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영화의 앞부분으로 가보자. 화가인 마리안느는 어느 저택으로 초대받는다. 그 집 딸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서다. 그림은 엘로이즈가 정략결혼을 할 상대에게 보여줄 용도다. 화가로서 마리안느에게 떨어진 어려운 임무는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다. 엘로이즈의 언니가 정략결혼이 싫어 자살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는 '산책 상대'를 가장해 힐끔힐끔 본 그녀 얼굴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려낸다.
↑ 마리안느(왼쪽)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기 위해 산책 파트너를 가장해서 그의 특징을 관찰한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자신에게 허락된 단 6일 동안 엘로이즈의 얼굴을 담아내기 위해서 마리안느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백해지는 것은 엘로이즈가 정략결혼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다. 지난해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기도 한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정교한 아이러니를 직조해낸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수)을 얻기 위해 엘로이즈가 저주하는 행위(정략결혼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 그리기)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엘로이즈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국영화로 치면 '아가씨'에서 김태리가 연기한 숙희 같은 역할이다.
↑ 엘로이즈는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며 아이러니는 비극으로 색채를 바꾼다. 18세기 프랑스에선 여성 간의 연애는 입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다. 모르는 사람과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절망적이지만 갈망하는 이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이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자유의지에 따른 결혼 외에도 둘의 시선이 닿는 곳곳에 여성에게 금지된 것이 가득하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남성의 누드화를 그릴 수 없게 돼 있다. 본인 이름을 단 전시도 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은 공적인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 코르셋을 조인다. 서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있을 땐 입지 않는 옷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할 때마다 드레스가 아닌 잠옷 차림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다. 사회는 그들에게 꽉 조여진 모습을 원했지만, 정작 마리안느는 상대방이 가장 느슨한 모습으로 지내길 바랐던 것이다.
↑ 두 여자의 거리는 점점 좁아진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하녀의 낙태 이후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나오는 건 바로 그런 맥락이다. 독자는 종종 오르페우스를 비판한다. 경고사항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무능하거나, 아내를 바라보길 참지 못하는 무절제함을 꼬집는다. 그의 무능함과 무절제함을 지적하는 동안 애초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저승세계의 설계자들은 비난의 망을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탈출하는 동안 돌아보지 않아서 살려줄 수 있다면, 왜 아무 조건 없이 살려줄 수는 없단 말인가.' 개인에게 안 좋은 선택지만 남겨준 시스템이 잘못된 거지, 그 안에서 더 안 좋은 선택을 한 개인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는 오르페우스를 욕하지만 아내인 에우리디케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서 돌아봤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마리안느는 실력 있는 화가이지만, 여성인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릴 수 있는 그림은 극히 제한돼 있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비난받아야 했던 여인들의 얼굴이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본인이 고를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에 그저 순간을 느끼고 머릿속에 새긴다.
↑ 두 여인은 종종 세상의 끝인 바다에 가서 이곳 너머를 상상한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대사와 표정, 몸짓만으로 서사 흐름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삽입곡을 자제하고, 숨소리와
붓이 화폭 위를 스치는 마찰음을 강조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명화를 이어붙인 듯한 화면 구성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엘로이즈'로 분한 아델 하에넬과 '마리안느'의 노에미 메를랑은 화면에 존재감을 불어넣는 연기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15세 관람가, 16일 개봉.
[박창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