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쩡한 펀드로 수수료만 잔뜩 떼이느니 배당주나 질러두고 싶어요."
"그래도 내 마지막 보루인데…. 주식 투자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최근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 규제 완화 소식에 직장인들은 환영과 동시에 우려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퇴직연금의 90% 이상은 예적금이나 금리연동형 보험 등에 묶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자꾸 떨어질 때 주식은 분명 투자의 다양성과 수익률 제고 차원에서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노후자금의 안정성을 생각하자니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주식 투자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05년 퇴직연금 도입 당시 정부와 많은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직장인의 노후소득원으로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저금리 시대를 맞아 퇴직연금 운용 방식의 취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수익률이 급감하자 '과연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마저 일고 있다.
이에 금융당국은 올해 주식 투자 규제 완화 등을 통해 퇴직연금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수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잘 잡을 수 있을까.
◆ 예금 등 안전 자산에 93% 편중…저금리 속 수익률은 '깜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현재 퇴직연금의 적립금 규모는 72조284억원에 이른다. 2009년말 대비 4배 이상 커졌다. 가입자 수 역시 약 463만5000명으로 전체 상용근로자의 45.6%를 차지할만큼 늘었다.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2015년 100조, 2020년에는 200조원의 규모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날로 커지는 규모와 달리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저금리 시대를 맞아 급감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원리금이 보장되는 확정급여형(DB·용어설명 참조)을 기준으로 지난해 1~3분기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연 2.7~3.0% 수준을 기록했다. 2012년 4%대 후반에서 5%대 이상의 수익을 올렸던 것과 비교하면 수익률이 반토막 난 셈이다.
이같은 수익률 악화는 저금리 기조 속에 예고 된 결과나 다름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대부분이 예금 등 금리에 연동된 상품에 투자돼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92.9%(66조9000억원)는 원리금이 보장되는 예금, 보험 등 상품에 운용되고 있다. 주식, 채권 등 실적 배당형에 운용 중인 적립금은 전체의 6.1%인 4조3000억원에 불과하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대부분의 퇴직연금이 1년 만기의 3%대 예금에 묶여 있는데, 저금리 기조 속에 앞으로가 더욱 큰 일"이라며 "원금보장형 상품에만 투자했다가는 임금상승률을 따라잡기 어려운데다 향후 퇴직연금을 받을 시점엔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 가입 기업과 돈 굴리는 운용사 모두 제 살 깎아먹어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용어설명 참조)으로 구성돼 있다. 국내에서 퇴직연금은 확정급여형이 주종을 이룬 결과 저금리 여파가 더 거셀 수 밖에 없다. 퇴직연금의 안전성을 특히 강조하는 국내 기업들은 근로자의 근속 기간과 연봉 수준에 따라 퇴직금 수준을 미리 정해 놓는 확정급여형을 선호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의 전체 적립금 중 70.3%인 50조6000억원이 확정급여형이다. 확정기여형은 20.8%인 14조9000억원에 그치고 있다(2013년 9월말 기준).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돈을 굴리는 곳이 대부분 예·적금인 상황에서 금리가 높을 때야 모르겠지만 금리가 낮아져 수익률이 떨어지면 이는 고스란히 기업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금융사를 통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확정급여형은 수익률이 하락하면 그만큼 기업이 충당금을 더 쌓아야하는 등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퇴직연금의 사업자 역시 저금리 시대에 제 살을 깎아먹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50개가 넘는 사업자 수로 인해 경쟁이 치열한 결과 스스로 고금리 함정에 빠져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도입 초기 은행과 보험사가 주도한 금리 경쟁에 증권사도 꼼짝없이 휘말렸다"며 "금리를 0.01%라도 더 얹어줘야 계약을 하는 기업 탓에 고금리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아예 기업체에서 금리쇼핑을 다니기도 한다"며 "원금 보장은 기본이고 여기에 금리를 얼마 더 줘야 퇴직연금 계약을 한다고 하니 제 아무리 증권사라도 안정적인 상품 투자에 주력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확정급여형의 경우 현재 적립금의 30%까지 주식 투자가 허용되지만 주식의 직접 투자 비중은 0.1%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미미하다. 저금리 기조 속에 고금리 예적금을 제시한 사업자들에 대한 역마진 우려가 더욱 커지는 이유다.
◆ 사업자의 자사편입비중 축소 및 기금형 도입 필요
최근 금융투자협회는 증권사 등과 함께 퇴직연금의 효율적인 운용방안 마련을 위해 태스크포스팀(TFT)을 꾸렸다. 더 이상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역마진 우려를 간과할 수 없어서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퇴직연금 운용에 있어 포트폴리오의 다양성 추구를 목표로 업계와 논의 중이다"고 밝혔다. 해당 TFT에서 논의된 사항은 금융위원회와 공유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자본시장 역동성 제고를 위한 세부계획의 일환으로 현재 금지된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 규제를 완화한다고 밝혔다. 또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의 경우 30%인 주식채권 투자한도 규제를 완화한다고 덧붙였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투자한도 규제를 얼마만큼 풀지는 여전히 논의 중"이라면서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심화되면서 연금 자산의 수익성이 저하되는 등의 문제점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13개국 평균 퇴직연금 자산 중 주식, 펀드, 채권 등에 자유롭게 투자하며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확정기여형의 비중이 2009년 42%까지 증가했다. 특히 미국 등 퇴직연금 자산 규모가 큰 국가일수록 확정기여형이 50%를 넘어섰다. 확정기여형이 20%에 불과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금융위원회는 퇴직연금의 신탁계약시 자사상품의 편입비중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는 계획 역시 세웠다.
현재 사업자들의 자사상품의 편입비중 한도는 50%에 달한다. 예를 들어 은행이 자사 상품인 예적금을 연금 자산의 운용상품에 편입할 수 있는 비중이 최대 50%에 이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올해 30%까지 줄이고 2015년에는 아예 금지하겠다는 복안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주식 투자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보다 자사상품 편입비중 축소와 같은 대책이 연금 자산의 자본시장 유입을 돕는데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은행과 보험사가 대부분 자신의 상품으로 포트폴리오를 짜는 구조 속에서는 투자의 다양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기금형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온다.
기금형 제도란 기업체가 별도로 퇴직연금기금을 설치해 회사와 근로자,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연금위원회가 기금운용을 금융사에 위탁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체가 퇴직연금 사업자에 모든 업무를 위탁하는 계약형만 가능하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소규모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퇴직연금 업무를 비전문가 직원 한 명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때 실적 배당형 상품에 투자해 손실이라도 나면 혼자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이 근로자의 노후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면서도 투자의 전문성을 높여 수익률 역시 제고할 수 있는 기금형 도입을 업계에서
※용어설명
확정 급여형(DB): 근로자의 평균임금과 근속연수에 따라 미리 퇴직급여를 결정해 놓은 것으로, 기존 퇴직금과 같은 체계로 이뤄져 있다.
확정 기여형(DC): 퇴직연금 운용 성과에 따라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퇴직급여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때 기업은 일정한 부담금만 퇴직연금에 적립하면 돼 관련 책임은 국한된다.
[매경닷컴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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