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 하나로 국내 외식업계에서 브랜드 파워를 뽐내고 있는 CEO가 있습니다.
바로 ‘(주)꿈꾸는이상’의 이승호 대표입니다.
그는 뚜렷한 전략으로 무장한 ‘갈비명가 이상’과 ‘소한마리’ 식당으로 연 160억원이라는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외식업계의 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는 모두가 ‘늦었다’고 하는 나이인 52세에 외식업을 시작한 ‘늦깎이 CEO’ 입니다.
이미 포화상태였던 외식업계에서 이 ‘늦깎이 CEO'가 기업형 식당을 만들고 세상에 알리기까지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 MBN ‘정완진의 최고다(최고 경영자의 고귀한 다섯 가지 비밀)’ 제작진이 직접 들어봤습니다.
Q. 우선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전자공학과를 전공한 이력을 살려 청계천에서 부품 판매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저의 첫 번째 사업이었습니다. 15년간 열심히 발로 뛰며 더 나아가 부품제조까지 하다 보니 돈이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청계천 부품메카에서 점점 입지를 굳히고 있는데 갑자기 인건비가 올라 부품제조업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끝에 다른 사업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학원 사업이었는데요.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대일외고 앞에 5층짜리 대형 입시학원을 차리고 성적우수자들에게 학원비 반값 마케팅을 펼치며 유명 강사들을 영입한 결과, 학원 사업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학원을 10여 년간 운영 하고 있는데 갑자기 IMF가 닥쳐왔죠. 가구마다 사교육 지출이 급격하게 줄어서 학원이 텅텅 비기 시작했습니다. 야심차게 걷고 있던 사업가로서의 길이 그렇게 끝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Q. 외식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렇게 IMF로 학원 사업에 위기를 맞고 있던 무렵, 어느 날 우연히 대학모임에서 전철우 씨를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전철우 씨는 '전철우 고향랭면'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이었는데요. 그렇게 전철우 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식업에 눈을 뜨게 되었죠. 그 날의 만남을 계기로 저는 '전철우 고향랭면'과 가맹계약을 맺고 외식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52세였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운영하던 형설학원을 2개 층으로 축소하고 대신 1,2,3층에 대규모로 냉면집을 차렸는데요. '전철우 고향랭면'이 워낙 인지도도 있었고 또 무더운 8월 한여름에 문을 열었던 덕분에 손님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박이 나나 싶더니 겨울이 되자 손님들이 확 줄더라고요. 직원 월급 주기도 빠듯할 정도였죠. 외식업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단 맛과 쓴 맛을 모두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Q. 첫 식당의 실패 후, 어떤 변화가 찾아왔나요?
일단 저는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외식업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섣불리 도전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죠. 메뉴나 마케팅에 대해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은 채로 덤볐으니 말 그대로 그냥 한 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실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외식업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저는 곧장 서점으로 가서 식당 운영에 대한 책을 잔뜩 집어 읽어나갔습니다. 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직접 전국의 맛 집을 순회하며 벤치마킹에 나섰죠. 손님이 많은 유명 음식점을 찾아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고 메뉴판을 몰래 들고 나와 맛 집 메뉴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메뉴판들이 방마다 쌓여 갔습니다. 재료를 추측해서 꼼꼼히 메모도 하고 서비스나 마케팅을 분석하면서 하루에도 몇 끼씩을 식당을 돌며 때웠습니다. 그렇게 1년 간 발로 뛴 결과 마침내 저만의 두 가지 원칙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고객은 귀신이니 속일 생각을 하지 말자는 점. 두 번째는 고객한테 본전 생각나지 않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고객들이 제 음식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아깝지 않게 한다면 대박을 거둘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제가 직접 발로 뛰고 느끼며 터득한 것이었고 나아가 저만의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마케팅을 하셨는지?
제 마케팅은 단순한 듯하지만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푸짐하게! 그러나 저렴하게!' 라는 것인데요. '전철우 고향랭면'의 실패를 딛고 '이상 고향냉면'으로 재오픈 했을 때 저는 다른 어느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는 푸짐한 갈비탕을 만들었습니다. 숟가락이 들어가기도 힘들 만큼 고기를 가득 채운 갈비탕을 1000원에 팔았죠. 남는 게 있느냐며 모두가 말렸지만 무조건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이 나오더군요. ‘싸고 푸짐한 집에 가고 싶다!’ 고기를 좀 덜 넣고 조금 더 남긴다고 얼마나 더 남기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추진했습니다. 물론 고기는 전문가들과 확인한 좋은 품질과 원산지의 것이었습니다. 값 싸고 푸짐한 질 좋은 음식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Q. 외식업 인생에서 가장 고비였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상 고향냉면'이 성공하자 맞은편에 3층 규모의 갈빗집을 또 차렸습니다. 상호도 '갈비명가 이상'으로 바꾸었죠. 두 건물 모두 경쟁하듯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2003년 하반기에 들어서자 '광우병 파동'이 들끓기 시작했죠. 소고기 매출이 급락하고 손님들의 발걸음이 뚝 끊겨버리더군요. 직원들에게 월급 줄 돈도 없었고 가게는 계속 적자 상태였습니다. 광우병은 제 외식업 인생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고비였습니다. 사회 전체가 광우병 논란으로 들끓어 식을 기색이 없었습니다. 만회해 보고자 대게 가게로 업종을 바꾸어보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름철에는 해산물이 잘 상해서 손님들이 오지 않았죠. 그렇게 고비의 시간들이 흘렀습니다. 서서히 광우병 논란이 누그러질 때쯤 손님들이 대게집 앞을 서성이며 ‘고기 안파냐’고 묻더군요.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죠.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잠깐의 위기에 너무 일희일비하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위기가 와도 잘 버텨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게 가게를 고 다시 '갈비명가 이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식당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죠. 현상 유지라도 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Q.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렇게 ‘갈비명가 이상’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고 있을 무렵 한 때 유명했던 고급식당인 북악정에서 가게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북악정은 건물이 근사한데다가 최초로 고기 굽는 연기를 아래로 빠지게 하는 시스템을 만든 곳이었죠. 버리기엔 장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북악정을 인수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간 경영난에 시달린 북악정을 다시 살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교통이 너무 좋지 않아 손님들이 쉽게 찾기 힘들었고 가격도 굉장히 비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도 '푸짐하게! 그러나 저렴하게!' 마케팅을 내세워 갈비탕을 1000원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또 외진 위치 때문에 홍보가 잘 되지 않아 전단지 120만 장을 뿌리며 홍보에 열을 가했습니다. 전단지를 들고 안 다닌 곳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인천공항에 가서 외국인이나 여행객들을 손님으로 유치하기 위해 식당 홍보를 하며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내실을 다지기 위해 훌륭한 주방장들과 지배인들을 몇 번이고 찾아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습니다.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지치지 않고 계속 발걸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죠. 결국 저는 든든한 조력자들과 함께 북악정을 인수 후 8배로 성장시켰습니다.
Q. (주)꿈꾸는이상으로 법인 설립하게 된 계기는?
북악정과 '갈비명가 이상'의 성공으로 저는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점포를 확대하며 더 이상 식당이 아닌 기업으로써의 조직체계를 갖춰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원들을 위한 교육용 교재를 출판하는 '이상미디어'도 설립했습니다. 직원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고급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으로 양성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렇게 탄탄히 내실을 다지며 2011년에는 '(주)꿈꾸는이상'이라는 법인을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기업화를 선언한 것이었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장사가 아니라 제대로 된 경영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Q.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온 대표님, 앞으로 꿈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현재는 정육식당의 점포 확대에 힘쓰고 있습니다. 매장의 수를 빠르게 확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