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바퀴를 돌아 인천항에 온 곡물을 보니 가슴이 벅찹니다. 일시적인 성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글로벌 곡물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힘을 쌓고 전진해나가겠습니다.”
지난해 12월 사료용 옥수수 7만 1500t을 싣고 브라질 산토스항을 떠난 길이 150m, 높이 30m 규모 벌크선 ‘피오렐라호’가 지난 1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출발 45일만이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11일 팬오션의 용선인 피오렐라호 조타실에 직접 올라 하역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김 회장은 지난해 7월 팬오션이 하림그룹에 편입되자마자 사내에 곡물사업실을 만들었다. 단순한 곡물 운반을 넘어 곡물 트레이딩과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겠다는 포부였다. 피오렐라호 입항은 팬오션이 곡물 유통사업을 개시한 후 첫 물량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1일 오전 팬오션은 김 회장과 추성엽 팬오션 대표이사 등 그룹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내항 TBT부두에서 ‘첫 모선 입항 기념식’을 열었다.
김 회장은 행사도중 기자와 만나 “우리나라에 필요한 한해 1500만t 곡물 수입 대부분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간기업의 곡물유통사 진출은 국가적 과제”라며 “오늘은 우리가 그 해묵은 실타래를 풀기시작한 것이고, 드디어 첫 발을 내딛은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입버릇처럼 “카길(Cargill)처럼 글로벌 곡물 메이저 회사가 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림그룹은 지난해 해운사를 인수하며 공급에서부터 운송, 수요까지 모두 갖춘 곡물사업 관련 수직계열화에 성공했다. 규모는 작지만 세계 최대 곡물회사인 카길의 사업모델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는 “곡물로 에너지를 만들수도 있고, 플라스틱·섬유도 만들어낼 수 있다”며 “카길이 150년이나 된 것 처럼 우리도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여러 사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글로벌 곡물기업을 만들겠다는 김 회장의 꿈은 1986년 하림식품을 설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닭고기·돼지고기 가공품 생산에서 시작해 양계·양돈까지 하는 회사 특성상 사료사업 비중이 커 김 회장이 사료 원료인 곡물 수입 과정에서 애간장을 태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곡물값 자체가 변동이 심한 것도 있지만 이를 운반해 오는 데 드는 운임비용이 맡기는 업체마다 모두 달라 가격 결정이 매우 힘들었다 ”며 “벌크선을 보유한 팬오션 같은 업체를 사들여 곡물 운송을 책임지면 하림그룹의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10년 전부터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 김 회장은 경기 불황에 더 빛나는 ‘M&A 승부사’라 부른다. 해운업 불황 속에서도 과감히 팬오션을 인수한 것 역시 위기기업을 발판삼아 그룹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란 전략적 판단때문이었다. 오랜 글로벌 조선산업 호황으로 벌크선이 무더기로 양산됐지만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어나를 곡물은 줄고 이를 실어나를 벌크선만 넘쳐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럴 때 값이 싸진 배를 빌려 곡물 운송에 쓰면 투입 비용이 줄어 수익성은 높아진다. 김 회장이 팬오션 인수에 나선 배경이다.
인수과정에서 다소 잡음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큰 무리없이 팬오션을 정상화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팬오션의 재무구조가 예상보다 빠르게 개선됐고, 모기업인 하림그룹의 수요기반을 활용해 시장 신뢰도 빠른 시간에 회복했기 때문이다. 팬오션이 세계 곡물 수송량 1위를 기록하던 과거 2007년 전성기 시절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사실상 마친 것이
김 회장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2300억원 가까이 나왔고, 부채비율은 70%대로 떨어졌다”며 “곡물 유통사업 인수 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걸렸단 점을 감안하면 1년, 2년이 지나면 팬오션은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서울 = 서진우 기자 / 인천 = 윤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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