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변동성 과도에 당국, 외환시장에 4년5개월만의 '구두개입'
↑ 환율 변동성 과도/사진=연합뉴스 |
북한 리스크와 저유가 등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19일 원/달러 환율이 5년8개월 만에 최고치인 1,230원대를 넘어서자 당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두개입' 방식으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밝힌 것입니다.
이 영향인지 이날 원/달러 환율은 장중 가파른 상승세가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장에선 당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원화 약세 쪽에 힘을 더 실어줄 대내외 요인들이 널려 있어 연내에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를 뚫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칵테일 위기에 금융시장 출렁…원/달러 환율은 연일 최고치 경신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등 당국이 외환시장 구두개입에 나선 것은 최근 변동성이 과도하게 확대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달 들어 지난 12일까지 서울 외환시장의 원/달러 환율 일중 변동폭은 평균 10.4원(평균 변동률 0.87%)으로 2010년 2분기의 12.8원(평균 변동률 1.08%) 이후 5년7개월 만에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2월 중 원/달러 환율의 전일 대비 변동폭도 평균 8.1원(평균 변동률 0.67%)으로, 역시 2010년 2분기(10.9원·평균 변동률 0.92%)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환율 변동폭이 커진 것은 한국경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요인들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올 들어 한층 뚜렷해진 국제유가의 하락 추세는 물론이고 중국 등 신흥국의 경기 둔화 우려,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 일본의 마이너스 정책금리 도입 등의 대외적 경제환경 변화는 한국 경제에 부담 요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에 악재가 될 것으로 판단되는 요인은 결과적으로 원화 가치를 떨어뜨려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냅니다.
여기에 북한의 장거리 로켓(미사일) 발사와 개성공단 폐쇄 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는 불안한 서울 외환시장을 한층 덜컹거리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들어 원/달러 환율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배경입니다.
16일의 한국은행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나와 연내 금리를 인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진 영향으로 17일에는 원/달러 환율이 무려 10.5원 급등했습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1,227.1원으로 마감해 2010년 7월 2일(1,228.5원) 이후 종가 기준 최고치를 나타냈고 하루 뒤인 18일에도 종가는 0.3원 올라 고점을 재차 높였습니다.
19일도 원/달러 환율은 개장 후 가파른 상승세를 타면서 장중 달러당 1,230원대를 돌파한 뒤 1,239.6원까지 올랐다가 당국의 구두개입 소식이 알려진 뒤 반락해 7.0원 오른 1,234.4원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이날 마감 환율은 2010년 6월11일의 1,246.1원 이후 5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것입니다.
문제는 원/달러 환율의 상승세가 잦아들만한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올 1월 정책회의 의사록에서 새로운 경제 하방 리스크를 언급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감산에 반대하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위험회피 심리는 한층 커지고 있습니다.
안전 자산인 달러화에 대한 투자 수요는 늘고 상대적으로 원화는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형국인 셈입니다.
◇ 당국 '인위적 조정 불가' 원칙론 고수하다 구두개입 나서
정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율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적인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일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하고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급격한 변동이 있을 때 미세조정 정도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4일에는 외환시장 변동성이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환율은 원칙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당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환율 변동폭이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 필요성에 대한 외환당국의 부담이 커진 것입니다.
이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0일 금융·경제상황 점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시장 변동성이 과도하게 확대되면 정부와 협력해 안정화 조치를 취하는 등 적극 대응할 것"이라고 밝히며 대응 가능성을 열어놨습니다.
18일에는 유 부총리가 한 발짝 더 나아가 "외환시장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며 "너무 급격한 변동이 있으면 정부가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을 하는 게 원칙"이라고 언급하며 대응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이 19일 장중 1,230원대까지 올라서자 결국 당국이 시장에 구두개입하는 형식으로 진화에 나섰습니다.
한은과 기재부는 "최근 원/달러 환율의 움직임과 변동성이 과도하다고 생각하고 시장 내 쏠림현상이 심화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며 "(대응에) 필요한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당국이 환율 상승시에 구두개입에 나선 것은 2011년 9월 이후 4년5개월 만에 처음입니다.
'변동성이 과도', '쏠림현상 우려' 등 표현을 쓰며 움직임에 나서겠다는 명확한 신호를 시장에 전달한 것입니다.
이는 시장의 과도한 불안감을 차단하기 위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외환시장에 매도하는 미세조정에 나설 수 있음을 예고한 것으로, 시장에선 이를 당국의 구두개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국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다른 신흥국 통화가 전반적으로 절하되고 있지만 원화는 글로벌 펀드 흐름과 동반해 절하 기대감이 너무 커졌다"며 "전체 추세와 괴리가 커졌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는 차원"이라고 개입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유 부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국제금융시장 변동에 대비해 외화유동성을 추가로 확보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현재 외환보유액은 예측 가능한 국제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할 수 있는 정도"라고 답했습니다.
↑ 환율 변동성 과도/사진=연합뉴스 |
◇ 원/달러 환율 상승세 지속 전망…연내 1,300원 돌파 전망도
전문가들은 외환당국이 구두개입을 단행해 원/달러 환율 급등에 잠시 제동을 걸었으나 환율 상승세는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리스크, 수출 경기 부진,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 등 원/달러 환율 상승을 이끌어온 요인들이 계속해서 환율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 16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 인하를 주장하는 소수 의견이 나오면서 원/달러 환율 상승세는 한층 가팔라졌습니다.
하건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1,250원까지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며 "당국도 급격한 쏠림 현상을 조정할뿐 원/달러 환율이 하락할 때보다 개입에 적극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당국이 원/달러 환율 하락이 아닌 상승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시장에 개입하려는 것과 관련해 최근 미국 의회가 환율 조작국에 제재를 가하는 내용의 '베넷-해치-카퍼(Bennet-Hatch-Carper·BHC) 수정법안'을 준비 중인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은 BHC 법안이 미국의 주요 교역국들 중에서 환율개입(의심) 국가들에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시장에 개입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한국이 1차 제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BHC 법안의 취지는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나라가 미국으로 상품을 수출할 때 이를 불공정 무역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당국의 이번 개입은 원화의 과도한 절하를 막는 쪽이어서 우리 외환 당국의 부담이 덜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외환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송인창 기재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이 최근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국 측 당국자들을 만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송 차관보는 미국 측에 BHC 법안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시장에서는 연말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이달 말 원/달러 환율이 1,265원에 도달하고 올해 최고치는 1,325원 정도로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도 올해 원/달러 환율이 1,300원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미국 금리 인상과 유럽중앙은행(ECB)의 추가 양적완화가 동시에 진행되면 아시아 통화와 유로화가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진단입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기본적으로 국내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 증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처럼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값 하락)이 급격하게 이뤄지면 불안감이 더 커져 수출 기업의 수혜보다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