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회사채 투자자인 한 모 씨는 25일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 씨는 “인생의 모든 생업을 마무리하고 평생 모아놓은 자금을 한진해운 회사채에 투자했다가 억장이 무너지고 있다”며 “한진그룹 대주주는 현대상선과 같은 부단한 노력과 고통은 전혀 없이 편한 길을 가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한 씨는 “이런 대주주의 도덕적 해이로 개인 투자자들이 손해보고 금융질서는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진해운은 지난 22일 금융권과 충분한 협의없이 갑작스레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런 한진그룹의 전격적인 결정에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채권단과 한진그룹은 하루하루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서 샅바 싸움을 하고 있다. 정부와 채권단은 한진그룹의 결정 직후 이런 자율협약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 과정은 여러가지 면에서 먼저 자율협약을 신청한 현대상선과 비교되고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향후 한진해운 정상화 과정에서도 처방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기업과 채권단과의 소통문제가 두드러진다. 비슷한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상선은 진통 끝에 지난달 29일 조건부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결렬 위기도 여러번 있었지만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과 현대상선이 서로 고통 분담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의 경우 채권단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자율협약을 신청하겠다고 했다고 채권단을 당황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가장 상징성있는 조치인 오너의 사재출연 여부에 대해 한진그룹은 침묵하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모친인 김문희 여사와 함께 300억원을 지난 2월 출연했다. 감자(減資)를 통해 돈을 날릴 가능성이 높지만 회사 회생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채권단 고위 관계자는 “한진그룹의 가장 큰 문제는 오너가 희생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진해운은 현대상선과 비슷한 문제로 위기를 맞았지만 채무 구조 등 재무구조측면에서도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해운은 차입금 중에 비협약 채권(비은행 채무) 비중이 높다. 비협약 채권 비중이 높을수록 산업은행이 주도할 채권단 공동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자율협약에 들어가더라도 채무조정이 가능한 채권이 적어 구조조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진해운은 전체 5조 6000억원 규모 차입금 중에 은행 대출이 7000억원(12.5%)에 불과하다. 전체 4조 8000억원 차입금 중 은행대출이 1조 1000억원(23%)에 달하는 현대상선조차 회사채 투자자 등과 협상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진해운의 경우 회사채 투자자를 비롯해 비협약채권자를 특정하기 어려워 채무조정 과정에서 더 큰 진통을 겪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회사채 시장 관계자는 “현대상선의 경우 공모 회사채 8000억원 가운데 75%는 지역 단위 농협, 신협, 새마을 금고 등 기관투자자가 보유하고 있고 개인 투자자 비중은 크지 않았다”며 “반면 한진해운은 투자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회사 측에서 만기조정, 출자전환 등 설득에 나서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비협약채권의 경우 투자자가 채권단 협약에 따르지 않고 원금 및 이자 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 비협약채권자 비중이 크면 채권단 결의가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과거 비협약채권 비중이 높았던 건설사의 경우 곧바로 법정관리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 소식에 회사채 가격은 급락했다. 2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한진해운 71-2와 76-2 회사채 가격은 이날 각각 4161원, 4200원에 거래됐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8000원대 거래되던 회사채 가격은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다.
이런 점은 현대상선과 극명히 비교된다. 지난해부터 꾸준히 유동성 위기설이 제기돼왔던 현대상선의 경우 자율협약 신청 소식에도 회사채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연말 6000원에 거래되던 현대상선 회사채 가격은 현재 500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자구노력 측면에서도 양 회사는 차이가 크다. 현대상선은 계열사 매각, 사업부문 매각 등을 통해 3조 9059억원을 조달했다. 이에비해 한진해운은 대한항공 유상증자 지원, 자산매각,영구 교환사채 발행 등을 통해 2조 1770억원을 조달하는데 그쳤다.
현대그룹은 현대증권을 KB금융그룹에 1조 2500억원에 매각한 것을 비롯해 불을 끄기 위해 큰 자산을 대거 매각했다. LNG 운송부문은 일치감치 9700억원에 매각했고, 현대로지스틱스를 6000억원에 팔았다. 부산신항만터미널 재무투자자 교체로 2500억원을 조달했고, 지난 2월에 벌크전용사업부는 1200억원에 매각했다. 한진그룹도 전용선사업 유동화를 통해 4200억원을 마련했고, 터미널 유동화(2800억원), 노후선박 매각(1365억원), 사옥·유가증권 매각(1194억원) 등 알짜 자산을 계속 매각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진해운은 현대증권, 현대로지스틱스와 같은 대형 계열사가 없어 자구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현대상선은 약 6개월전부터 용선료 인하 협상을 시작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지만 한진해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제 해운동맹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진해운에 속해있던 CKYHE 동맹이 사실상 와해 된 것도 악재다. 한진해운은 이제 새로운 동맹을 찾아야 하지만 유동성 위기에 몰린 상황을 감안하면 녹녹치 않다.
채권단은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가더라도 상거래 채무 등은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박용범 기자 / 김혜순 기자 / 정석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