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다 지난해 귀국한 권정우 씨(42)는 올여름 폭염을 이기기 위해 에어컨을 하루 8시간 이상 가동했다. 요금이 궁금해 한국전력 사이트에서 예상요금을 검색해본 권 씨는 한 달 1054㎾h 전기 사용으로 전기요금이 58만3600원이나 나온다는 얘기에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김씨가 지난 여름 미국에서 똑같은 전기량을 소비했을 경우 내야하는 전기요금은 124달러69센트(약 13만8000원)에 불과했다.
권씨는 “휴대폰 한 대 값이나 되는 전기요금 ‘폭탄’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며 “서민·중산층에게 이런 부담을 안겨주는 전기료 누진제는 빨리 없어지거나 최소한 완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여름철 폭염으로 가정용 에어컨 전기 사용이 크게 늘면서 전기요금 누진제가 연일 난타당하고 있다. 사용량에 따라 전기요금이 최대 11.7배나 차이가 나는 현행 누진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갈수록 여름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덩달아 매년 전기 사용이 늘고 있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10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중산층 4인 가구 평균 전기사용량 수준인 314㎾h를 쓸 경우 한국은 4만4040원, 미국은 4만3000원, 일본은 11만3243원에 달한다. 그러나 여름철 에어컨을 가동한다고 하면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에어컨(1.1㎾ 벽걸이 기준)을 하루 12시간 가량 틀 경우 사용량에 해당하는 800㎾h에서는 한국의 전기요금은 32만4300원이나 되지만 미국은 한국의 3분의 1도 안 되는 9만2689원에 불과하다. 일본도 한국보다 저렴한 31만2752원이다. 현행 누진제는 사용량이 적을 때는 유리하지만 많을 때는 요금 폭탄이 돼서 돌아온다.
우리나라처럼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과 비교해 보면 사용량이 50㎾h일 때 일본이 한국보다 4.9배 비싸다. 사용량이 200㎾h로 4배 늘면 한국은 1만9750원으로 5배 이상 늘어나는 반면, 일본은 4만9203원으로 3배 늘어나는데 그친다. 300㎾h와 400㎾h 구간에서는 일본이 한국보다 전기료를 더 내지만 600㎾h부터는 역전해 한국이 더 많이 내게 된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가정용 전기요금이 저렴한 편에 속하지만 징벌적 누진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단순히 싸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2014년 기준 한국의 1인당 가정용 전력소비량은 1278㎾h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나라 중에 26위다. 가장 많이 쓰는 노르웨이(7415㎾h)보다 6분의 1수준이고, OECD 평균인 2335㎾h의 절반 밖에 안 된다. 가정용 전기요금에 최대 11.7배에 달하는 징벌적 누진제가 적용되다 보니 집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 사용량으로 치면 후진국인 셈이다. 누진제 때문에 1인 가구에선 전력을 펑펑 소비하는 반면 3,4인 가구 등에선 전력 소비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등 훨씬 부담이 크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과 교수는 “누진제 1단계 혜택은 고소득·미혼가구가 많은데 이들이 원가 이하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며 “실제 3~4인 가구가 부담하는 전기료는 외국과 비교했을 때 싸지 않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고소득 1인 가구는 싼 요금을 쓰고, 가족이 많은 서민층은 비싼 요금을 쓰는 것이 문제”라며 “단순히 전기요금이 싸다 비싸다를 말할 게 아니라 합리적인 구조인가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력소비량이 늘면서 현재 누진제 3단계(200~300㎾h)와 4단계(300~400㎾h) 구간 가구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산층 중에 100㎾h 이하를 쓰는 가구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기본을 300㎾h 수준으로 확 올리거나 누진배율을 축소해 요금을 합리화해야
산업·상업용과 가정용 전기요금 간 차별도 큰 문제다. 산업용과 상업용 전기엔 누진제가 아예 없다.
전력거래소 처장을 역임한 김광인 숭실대 겸임교수는 “현행 누진 6단계 가운데 2단계와 3단계를 통합해 2단계 요금을 책정하고, 3단계와 4단계를 통합해 3단계 요금을 부과하는 식이 합리적”이라고 강조했다.
[고재만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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