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경유·등유 등 석유제품을 유통하는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업계의 요구에 못 미치는 정책만 내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석유대리점·주유소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석유제품 수평거래 허용 방안에 대한 업계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석유대리점·주유소 공급 과잉과 같이 정부가 나서야 할 시급한 문제는 외면한 채 규제완화라는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유유통업계는 현재 국내 석유유통시장의 과당경쟁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한국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국내 주유소 수는 1만2633개다. 업계가 보는 적정 주유소 수인 7000개보다 5000개 이상 많다. 이로 인해 손익분기점도 맞추지 못하는 주유소가 속출하고 있지만 마음대로 폐업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한국석유유통협회 관계자는 “주유소 업자는 기름이 새면서 오염된 토양을 세척한 뒤 폐업신고를 할 수 있다”며 “이 비용은 1억5000만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주유소를 개점하는데 들어가는 시설비용(2억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들여야 폐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익 저하로 폐업하는 주유소 운영자에게 그런 목돈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주유소협회는 업주가 폐업신고를 할 수 없어 영업을 멈춘 채 방치하고 있는 주유소가 전국에 1000여곳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석유유통업계는 경영이 어려운 주유소의 전업·폐업 지원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2014년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이하 석대법)’ 시행령을 개정해 정부가 주유소의 경영을 지원할 근거를 만든 뒤 별다른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고유가 시절 국민들의 유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알뜰주유소 정책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정부·농협으로부터 5년동안 153억원의 시설개선지원금을 받은 알뜰주유소 중 상당수가 석유공사와의 계약사항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알뜰주유소는 판매하는 석유제품의 50% 이상을 의무적으로 석유공사로부터 공급받아야 하지만 석유공사가 관리하는 알뜰주유소 436곳의 72.6%(320곳)가 의무구매비율을 지키지 않았다.
석유유통협회 관계자는 “석유공사가 정유사들을 대상으로 경쟁입찰을 붙여 저렴한 가격으로 알뜰주유소에 제품을 공급한다는 취지는 좋다”면서도 “석유제품 가격 변동에 따라 오히려 석유공사의 공급가격이 더 비쌀 때가 있어 알뜰주유소들이 의무구매 비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유가 시절 만들어진 알뜰주유소 정책을 계속 유지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석유유통업계는 구조조정 지원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엉뚱한 정책에만 공을 들이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주유소와 석유판매소간의 석유제품 거래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석대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현재 석대법은 정유사-석유대리점-주유소·석유판매소의 수직거래나 같은 형태로 영업하는 업체끼리의 거래만 허용한다.
문제는 규제완화의 수혜 대상인 주유소와 석유판매소가 정부의 수평거래 허용 방안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유소협회와 석유판매소협회는 정부가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기 전부터 수평거래 허용 방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밝혀왔다.
석유제품 수평거래가 허용되면 석유제품 유통질서가 무너져 유사석유판매와 무자료거래가 양산될 것이란 게 업계의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주유소와 석유판매소가 짜고 불법 판매행위를 한 뒤 당국에 적발되면 석유판매소가 영업정지 등의 처분을 받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전했다. 처벌로 영업정지를 받아도 대규모 시설투자를 하지 않은 석유판매소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기 때문이다. 석유유통업계는 산업부가 규제완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업계의 모든 주체들이 반대
업계 관계자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았던 지난 2011년 정부가 기름값 잡기에 나선 이후 업계와 관계가 서먹해졌다”며 “업계와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엉뚱한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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