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주말 오후, 여름방학과 휴가로 한산하던 서울대 교정이 갑자기 몰려든 이들로 북적거렸다.
학생들 뿐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대기업 팀장부터 미모의 커리어 우먼까지 대학 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사람들로 300여명이 정원인 컨퍼런스 홀이 가득찼다. 개중에는 외국인들도 간간히 자리해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바로 서울대학교 블록체인 연구회 디사이퍼의 첫 정기 컨퍼런스 '디-퍼런스 2018'이 열린 현장이다.
디사이퍼는 블록체인 기술에 초점을 맞춰 건강한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학회답게 토요일 오후를 기술 세션으로 꽉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400여명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행사에 참석한 블록체인 관계자들은 역시 서울대생들이라는 평가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블록체인 하나만 보고 달려왔던 디사이퍼 회원들도 성공적인 개최를 자축했다.
↑ 디-퍼런스 20189이 열린 서울대 글로벌 컨벤션 플라자 입구 [제공 = 디사이퍼] |
디사이퍼의 시작은 지난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에서 가상머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김재윤 씨(현 디사이퍼 회장)을 포함해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학생들이 공부할 곳을 물색하다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해 결국 직접 설립으로 방향을 튼 것이 바로 디사이퍼다. 초기 8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현재는 박사 과정 졸업생 1명을 포함해 총 44명으로 불어났다. 불과 6개월만에 디사이퍼에서 만나 창업한 블록체인 스타트업만 해도 토큰 이코노미를 설계하는 디콘(Decon), 스마트 컨트랙트 감사 전문 기업 해치 랩스(Haechi labs) 등이 출범했다. 기술에 대한 목마름과 불타는 학구열이 빚어낸 급성장이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도 연구 활동으로는 블록체인 전문 기업인 넌스와 함께 디사이퍼를 양대 축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디사이퍼의 지향점은 블록체인 기술을 연구, 검증, 교육함으로써 건전한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출범 초기 한달 동안 블록체인 기술의 현 주소를 파악하고 각종 저널 기고, 정기 연재를 거쳐 블록체인 커뮤니티와 소통을 가졌다. 두번째 단계로 분야별 연구 팀을 결성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선행연구 검토,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기준이나 개념을 정립하고 제시에 나섰다. 이같은 활동의 결과를 공개하는 자리가 바로 첫번째 정기 컨퍼런스인 디-퍼런스 2018이다. 문건기 디사이퍼 부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이번 컨퍼런스는 디사이퍼의 비전과 연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전달하는 자리"라며 "국내 블록체인 연구자들을 디사이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블록체인 생태계가 화합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블록체인의 산업과 학계의 만남
이번 컨퍼런스에서 두드러진 점은 블록체인 분야에서 내노라 하는 기업들이 대거 출동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블록체인 기술 컨퍼런스인 만큼 기술적인 협력을 모색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감도 끌어올리겠다는 포석에 기반한 행보다. 국내 대표적인 암호화폐 투자 펀드인 해시드를 비롯해 국내 암호화폐 중 시가총액이 가장 많은 아이콘, 블록체인 전문 개발 기업이자 암호화폐인 아르고(Aergo)를 개발한 블로코, 블록체인 기반 게임인 고크립토봇을 개발한 코드박스 등이 연사로 나서 청중들과 호흡했다. 언체인, 체이너스, BRP 등도 후원에 나섰다.
해시드의 김균태 최고기술책임자(CTO)는 강연을 통해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정상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에 다각도로 접근하는 연구 개발에 투자함과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사업 분야에 블록체인을 잘 적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육성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초기에는 블록체인 기술 자체를 알리기가 힘들었지만 디사이퍼 등 다양한 학술 모임이 등장하면서 기술이 왜곡된 상태로 외부에 확산되는 우려를 덜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박헌영 블로코 CTO도 "전세계를 놓고 봐도 한국은 블록체인 수용도가 높고 각 산업에 대한 블록체인 적용 사례가 풍부해 주목을 받고 있다"며 "기업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이득을 창출하는 사례가 등장할수록 기술 자체도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패널 토의에서도 발표자와 청중간 질의응답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한 청중은 코드박스를 대상으로 블록체인을 실제로 구현한 경험에 따른 조언을 구하는 등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대한 심도깊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 디-퍼런스 2018의 첫번째 패널 토의. 왼쪽부터 박헌영 블로코 CTO, 한겨레 디사이퍼 선임 연구원, 김슬기 코드박스 개발자, 김재윤 디사이퍼 회장. 사회자는 문건기 디사이퍼 부회장. [사진 출처 = 디사이퍼] |
이날 김재윤 회장은 디사이퍼의 그간의 연구 성과의 일환으로 블록체인을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인 '순서(order)'를 제시했다. 블록체인 기술은 결국 정보의 처리인 트랜잭션에서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관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 회장은 "블록체인의 핵심 개념으로 순서를 정의하면 이중지불, 성능, 확장성과 같은 문제를 재구성할 수 있다"며 "순서를 정하는 방법, 순서를 지키는 방법으로 나눠 각각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순서라는 개념에 의거해 새롭게 설계되는 블록체인의 밑그림을 내놨다. 현재 블록체인 분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제 중 하나인 성능에 대해 '순서'가 뒤바뀌는 것을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순서라는 개념에 의거해 손해를 일정부분 허용하는 방식으로 성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김종호 디사이퍼 부회장 겸 해치 랩스 대표(CEO)가 프록시와 레지스트리 개념을 적용해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스마트 컨트랙트 프레임워크를 선보였다. 또 류석영 카이스트 정보보호대학원 교수가 초빙 연사로 등장해 스마트 컨트랙트의 분석과 버그 감지에 대한 최근 활동을 소개했다. 디콘의 파트너이자 디사이퍼의 선임 연구원인 송범근씨는 경제학의 메커니즘 디자인과 토큰 모델 설계를 결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 블록체인을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인 `순서`를 제시하는 김재윤 디사이퍼 회장 [사진 출처 = 디사이퍼] |
디사이퍼는 이번 컨퍼런스를 기점으로 삼아 다음 단계에 돌입한다. 내부 역량 강화와 외부 인지도 상승이 어느정도 이뤄졌다는 계산 하에 연구 개발이 실제로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생태계의 주도권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산학 협력을 통해 연구 결과물을 현실에 적용하고 기술 검증 작업을 통해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 블록체인 교육을 통해 지식 격차를 해소하고 기술을 전파하며 조직을 확장해 역량도 강화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다음달 대대적인 학회원 모집에 나서며 매월 마지막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오픈 세미나도 계획 중이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블록체인 생태계를 주도하는 시점은 내년으로 예상하고 있다.
↑ 컨퍼런스를 마친 디사이퍼 학회원들 [사진 출처 = 디사이퍼] |
[디지털뉴스국 김용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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