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세계 최초로 '테크 대사'를 맡고 있는 덴마크의 캐스퍼 클린지 대사는 지난 10일(현지시간) 팔로알토 소재 대사관에서 매일경제신문을 만나 이같이 밝혔다.
클린지 대사는 "덴마크의 외교 혁신의 중심에는 '테크플로머시'정신이 있다"며 "국가 외교의 중심에 안보, 이민 등 외에도 기술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공룡들은 이미 전세계의 경제·사회·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조직으로, 일개 기업 이상의 의미"라며 "이들의 파워는 전세계가 외교력을 발휘해 공동 대응하지 않으면 한나라가 도저히 대응할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는데도 외교관들은 아직까지 1900년대 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EU가 구글에 천문학적인 세금을 매기고, 미국과 중국이 화웨이를 둘러싼 무역전쟁을 벌이고, 페이스북의 미국 대선 개입 논란을 빚고 있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IT공룡들이 자리하고 있다. IT기업들 자체가 외교의 대상이 됐다는 게 클린지 대사의 얘기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대의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클린지 대사는 강조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일년의 절반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는 코펜하겐·베이징에서 일을 한다.
클린지 대사는 지난 2017년 처음 실리콘밸리에 부임할 때부터 글로벌 외교가에 화제를 낳았다. 프랑스·독일 등 다른 유럽국가들도 디지털 장관, 스타트업부처 등 IT기업들을 전담하는 다양한 정부조직을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나라 밖으로 외교 인력을 파견해 IT기업을 국가 수준으로 대응하는 나라는 덴마크가 처음이자 유일하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덴마크의 사례를 벤치마크해 실리콘밸리 대사를 만들자는 법안이 발의되기는 했지만 통과되지는 못했다. 클린지 대사가 외교가의 혁신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도 이같은 배경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한복판에 위치한 덴마크의 '테크 엠버시(기술 대사관)'을 찾기 위해 같은 길을 몇번이나 왔다갔다 헤맸다. 대사관 앞에 흔히 보이는 국기, 철조망, 경호인력 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 대신 클린지 대사가 보내준 대사관 주소의 1층에는 레스토랑·스파·피트니스클럽 등이 즐비했다. 팔로알토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다. 2층으로 올라가니 그제서야 대사관의 보안철문이 나왔다. 입구 정면에 붙어있는 여왕의 사진만이 '여기가 덴마크 대사관이 맞다'고 확인해주는 듯했다.
캐스퍼 클린지 대사의 집무실에 처음 들른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란다고 한다. 그는 빳빳한 양복을 잘 다려입은 전통적인 대사가 아니다. 늘상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실리콘밸리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스타트업 직원으로 착각할 정도다. 심지어 사무실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줄곧 서서 일한다. 얼마나 분주하게 일하는지 옆에 잠깐 있어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기자가 찾아간 10일에도 그는 사무실에서 본국으로 보낼 IT기업에 관한 비밀 외교문서를 작성하던 터였다. 보고서에 들어갈 숫자를 재차 확인해달라고 직원들에게 주문하던 클린지 대사는 기자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그제서야 웃어보였다. 클린지 대사(47)는 직업외교관으로 과거 아프가니스탄 재건, 코소보 등 분쟁지역에서 주로 일하다가 실리콘밸리로 왔다.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아래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는 "화웨이 사태, 러시아 선거 개입 등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며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분쟁지역이 실리콘밸리"라고 답했다.
지난 3년간 좌절도 많았다. 통상 외교관이 부임하면 해당국가 외교가에서는 반갑게 맞아주는 게 정상인데, 실리콘밸리는 그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처음엔 '테크 대사' 명함을 내밀자 "원하는 게 뭔가. 우리를 규제하려고 찾아온건가"하는 차가운 반응도 많았다. 구글·페이스북에 천문학적인 세금을 매긴 장본인인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유럽연합(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이 덴마크인인 것도 부정적 이미지에 한 몫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덴마크 외교관이라면 일단 '페르소나 논 그라타(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세계경제포럼(WEF)·유럽연합(EU) 등 글로벌 리더들의 모임에서 기술 어젠다를 설정하는 등 목소리를 내자 IT공룡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EU의 규제를 풀어서 설명해달라는 요구부터, 기업들의 현장 목소리를 반영해달라는 요청도 나올 정도다. 덕분에 지금은 애플, 페이스북 등 주요 경영진들과는 긴밀한 만남을 유지할 정도가 됐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권력은 하나의 나라를 넘어서서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커졌다"며 "이제 실리콘밸리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사이버 보안·민주주의 등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과의 대화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밝혔다.
다행히 클린지 대사는 거절에 익숙한 성격이다. 그는 "미얀마 외교관이 되면 인권문제를 얘기해야하는 것 처럼 듣기 싫은 얘기라도 잘 해나가는 게 외교관의 직업"이라며 "데이터기업에 찾아가 데이터 프라이버시를 논의하자고 하면 물론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책임자들을 꾸준히 만나면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테크 대사의 소명"이라고 밝혔다.
덕분에 실제로 지난해에는 성과도 상당했다. 지난해 모로코에서 덴마크 여행객이 IS테러 소행으로 사망했는데, 이와 관련된 동영상을 즉각 유포 중단해야지만 추가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페이스북, 구글 등에 즉각 연락을 취해 바로 영상을 막았다. 한발 더 나아가 IT공룡들중에 덴마크에 데이터센터를 짓고 싶다는 요청까지 들어왔다. 평소 쌓아놓은 관계가 없었더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클린지 대사는 "덴마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국민의 디지털 수준이 높고, 기술 혁신을 통해 기존 산업을 살려온 나라"라며 "지난 3년간 이런점을 미국 IT기업들에 꾸준히 알리고, 협업을 유도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사실 덴마크 인구는 580만명 남짓으로 캘리포니아의 6분의 1밖에 안된다. 덴마크의 1년 GDP(3500억달러)가 실리콘밸리 거물 페이스북 시가총액(5800억달러)의 절반 정도다. 심지어 덴마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복지강국 북유럽의 한적한 낙농국가다.
하지만 클린지 대사가 IT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이를 능가한다. EU와 덴마크로 수없이 보고서를 보내면서 IT기업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년을 보냈더니 이제는 각종 사이버 보안, 디지털 세금 등 굵직한 IT이슈가 있을 때마다 미국과 유럽 양쪽에서 모두 그를 찾는다. 최근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SNS를 견제하기 위해 페이스북도 만나고 EU에 정책제안도 하는 게 그의 주된 일이다.
클린지 대사는 "역설적이지만 덴마크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디지털 영향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한국과도 4차산업혁명 시대 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해 꾸준한 협업을 해왔는데 한국과
[팔로알토 =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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