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식과 성동일, 박철민 등은 명품 조연배우의 대명사다. 때로 주연보다도 빛나는 이들의 연기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의 주가가 더 높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조연’ 하면 남자 배우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몰린다. 지금 충무로와 여의도엔 여성 조연의 바람도 만만치 않다.
◇ “애써 그녀를 찾을 필요는 없다” 굵직한 영화들 휩쓴 라미란
현재 박스오피스를 휩쓸고 있는 영화는 단연 ‘연애의 온도’다. 개봉 첫주 1위를 차지했고, 누적 관객수가 64만명을 넘어 곧 100만 돌파를 앞둔 상황이다. 그 인기의 중심엔 배우 라미란(38)이 있다.
그는 은행 내 자기 주도적이고 당찬 여자 상사를 연기했다. 극 초반 불륜을 저질러 직장에서 머리채를 잡히기도 한다. 후배의 실수로 이혼까지 하게 된 후에는 이민기를 벌벌 떨게 하는 무서운 선배포스를 보여준다.
라미란이 처음 얼굴을 알린 것은 2005년작 ‘친절한 금자씨’였다. 박찬욱 감독 영화의 단골 요소이기도 한 ‘여성의 주체적 성행위’의 피해자였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할 장면이다. 교도소 내 목욕탕에서 ‘마녀’의 명령으로 오수희(라미란)은 혼신을 다해 구강성교를 실시한다. 이후 이영애가 그를 대신 죽여주고, 오수희는 선물로 금자의 권총을 장식할 은장을 선물해준다.
영화 ‘댄싱퀸’에서는 또 다른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주인공 엄정화의 친구이자 ‘왕십리 빨간망사’로 나왔다. 그는 황정민·엄정화만큼 빛나는 감초 역할로 400만이라는 후한 성적표에 일조했다. 오랜 기간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던 그는 가무에도 능했다. 또한 극중 슈퍼스타K 오디션 장면에서 대부분의 대사는 에드리브였다고 하니 베테랑 연기실력을 실감케 한다.
이처럼 굵직한 영화에 대거 출연해 흥행 견인차 역할을 한 그는 영화 뿐 아니라 드라마 ‘짝패’와 ‘패션왕’ ‘더 킹’ 등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발휘했다. 곧 안방극장을 찾아갈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도 멋진 조력자 역할을 해낼 예정이다.
◇ 박준금 ‘현빈 엄마’에서 ‘국수집 맏며느리’로
중년이 되어 꽃피운 여배우를 말하자면 박준금(52)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80년대 초 이른 데뷔를 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던 중 2010년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 모 문분홍 여사를 열연, 한 번에 안방극장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고집 세고 차가운 성격에, 입에서는 가시가 발사돼 상대를 다치게 하는 악녀 중 악녀였다. 그런데도 독한 어머니 뒤에 가려진 여인의 모습까지 그려내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그녀가 착용한 의상과 쥬얼리 등은 연일 화제가 되며 ‘박준금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배우라면 패션에 대한 것은 갖춰야 하는 게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도 볼 권리가 있고 우리는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라며 그만의 연기철학을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선지 드라마 속 고정적인 엄마의 캐릭터를 깼다는 호평을 끌어냈다.
박준금의 이같은 철학은 MBC ‘백년의 유산’에서도 빛을 발했다. 현재 시청률 20%를 웃도는 주말 인기 드라마다. 박준금은 동서 간 갈등으로 티격대격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아줌마 도도희를 연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전형적인 아줌마란 없다.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서슴지 않는 도도희는 최근 핫핑크 립 컬러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요새 가장 유행하는 컬러라지만, 젊은 여배우들도 선뜻 하기는 어려운 메이크업이다.
중견 배우인데도 늘 새로운 시도에 목마른 박준금. 앞서 “시청자들께 항상 볼거리를 제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나보다.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던 그의 말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전원일기’ 출신 김혜옥, 푼수와 우아를 넘나들며
‘국민 드라마’ 칭호까지 붙으며 인기를 얻은 KBS2 ‘내 딸 서영이’가 최근 종영했다. 47.6%의 시청률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도 받았다. 출연진 모두가 높은 시청률의 1등 공신이었지만 그 중 물이 오른 배우를 꼽으라면 서영이 시어머니 김혜옥(56)이다. 남성 팬들도 많아졌다. 비결이 뭔가 하니 그간 우아한 부잣집 사모님을 전담했던 그지만, ‘서영이’에서는 조금 달랐다.
그가 연기한 차지선은 중매로 남편을 만나 정 없는 결혼생활을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누리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인물이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집에서도 늘 화려한 차림으로 무장하고 혼자서 오페라를 부르며 더더욱 고상한 생활을 한다. 겉으로는 우아해도, 시청자들에겐 영락없는 부잣집 ‘푼수’로 비춰질 법도 하다.
그렇지만 시청자들은 그를 사랑했다. 독해 보이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유치함과 계산 없는 모습이 시청자들은 웃고 인간미를 느낀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도 떼 묻지 않은 순수함과 외로운 인생에서 파생된 히스테리와 고독을 섬세하게 다룬 그의 연기력이 통했다.
김혜옥은 또한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귀여운 푼수 할머니였다. 김혜옥이 사람들에게 각인된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어 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 당시 40대였던 김혜옥은 김영옥 한영숙 등과 함께 할머니 3총사 중 막내할머니 역을 맡았다. 여고시절 이후 정신연령이 멈춰버린 할머니였다.
노인이라는 신체적 제약을 풀어내면서도 소녀 감성을 놓지 않는 것이 관건 이였다. 젊은 척 하는 걸 좋아해 밖에서도 할머니보단 아줌마로 불리길 바라고, 조카와는 꼭 친구처럼 티격대격 싸워댔다. 그저 귀여운 사춘기 할머니였다. 이로써 그는 40대에 접어들어 전에 없던 독창적인 소녀 캐릭터를 확고히 했다. 덕분에 ‘서영이’에서 남성 팬을 확보한데 반해 당시에는 어린 소녀 팬들을 사로잡았다.
“저는 ‘전원일기’에서 ‘서울댁’만 20년 가까이 했어요. 배우에게 나이란 큰 의미가 없어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고 좋지요. 경험이 축적된 만큼 연기의 폭
앞서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40대에서 50대로 접어들며 전성기를 맞이한 김혜옥이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연기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다양하고, 또 나이를 대변하듯 깊고 진하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경진 인턴기자/사진 강영국 기자,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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