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살아 숨 쉬는 인생을 살고자 한 순간에 모든 걸 버린 남자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맨땅에 헤딩’. 미국 태생,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곤 초등학교 수준의 인사말 정도가 전부인 이 남자가 어느 날 돌연 한국행을 결심한다. 요즘 대학로의 최고 대세로 떠오른 배우 박은석의 이야기다.
최근 대학로 한 카페에서 연극 ‘옥탑방 고양이’와 ‘트루웨스트’를 오가며 극과극 매력을 뽐낸 박은석을 만났다. 그는 ‘옥탑방 고양이’에서는 완벽한 비주얼을 지녔지만 알고 보면 허당인 이경민을, ‘트루웨스트’에서는 내면의 야수성을 숨긴 채 오로지 모범생으로 살아온 오스틴으로 분해 열연을 펼치고 있다.
“어릴 때 미술에 소질이 있어 자연스럽게 한 가지 길만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 갑자기 안 좋은 일들이 겹치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 고민들이 많아졌죠. 생각보다 제가 해왔던 일에 대한 만족감이 적었고 성공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극심한 우울증까지 앓게 됐어요. 그 때 저를 살린 게 바로 연기예요.”
공개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 그는 담담한 눈빛과 편안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보냈어요. 그 어떤 것도 큰 위로가 되지 않았죠. 어머니의 권유로 우연히 간 연기 학원에서 비로서 새로운 희열을 경험했어요. 나의 숨겨진 욕망을 꺼낸 기분?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병은 치유됐고 저의 욕망과 꿈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 30년, 아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성공 보다는 행복을, 안락 보다는 도전을 택한 박은석. 그는 자신이 준비해왔던 모든 걸 뒤로 한 채 무작정 한국행에 올랐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단연, 언어의 장벽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선택한 건 바로 군입대. 무서울 만큼 용감한 선택이다.
“어차피 제대로 할 생각이었어요. 두려움 따윈 없었죠. 스스로 언어를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원입대를 하게 됐어요.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배웠고 단체 생활도 큰 도움이 됐어요. 꿈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탁월한 결정이었죠! 하하”
그가 한국에 온 이후 경제적 지원은 모조리 끊겼다. 15세 이후 스스로 용돈벌이를 해 온 그이지만 터전을 한 순간에 옮긴 현실은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학원 강사와 과외는 기본,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와 등록금, 학원비를 마련했다.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서울예대 합격, 지상파 드라마는 물론 대학로 주요 무대에도 서게 됐다. 평소 눈독을 들였던 작품의 주연으로 캐스팅되는 희열도 맛봤다.
“처음 연극 ‘옥탑방 고양이’를 관람하면서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제 모습을 상상해봤어요.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첫 오디션은 떨어졌지만 다른 지상파 드라마 출연 후 재도전해 결국 합격했어요. 겉은 전형적인 도시남이지만 꿈과 사랑만큼은 순박미가 있는 경민 캐릭터가 참 좋았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큰 힘을 받고 있어요.”
“초반 차분하고 매사에 이성적인 경민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숨겨진 모습들을 하나 하나 방출해요. 허당끼에 순박미 넘치는 귀여운 남자. 전과 후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애썼고, 순간 애드리브도 은그 많이 했어요.”
과도하게 연극적이거나 지극히 일상적이지도 않다. 동작이나 말투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도가 있고, 감정 표현에는 강약 조절이 탁월하다. 이것이 바로 박은석표 경민의 관전 포인트.
늦게 시작한 만큼 그가 지금의 모습만큼 성장하기까지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한 때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방송 연예 전공이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무대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나의 모든 게 노출된, 부끄러운 느낌이랄까? 평소 존경했던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또 한번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 같아요. 그분의 수업은 저를 크게 변화시켰죠. ‘너는 조금만 더 잘 고치고 다듬으면 대학로의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있어!’ 그 분의 이 한 마디가 저를 무대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연극 ‘옥탑방 고양이’는 남녀의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고민하는 ‘꿈’ 을 이야기한다. 당장은 힘들고 가망성 없는 듯하지만, 결국 우리가 고뇌를 감수하며 안고가야 할 것이 바로 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박은석의 연기가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의 주제와 배우의 삶 사이에 진정한 공감선이 있었다는 것.
“옥탑방 안에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앞만 보고 조급하게 달려왔지만 다시 초심을 찾게 됐고,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 꿈이요? 한국을 넘어 할리우드에서 연기하는 거죠! 화려한 작품 보다도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나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파이팅!”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사진 팽현준 기자 kiki2022@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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