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은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저예산 영화를 지칭하는 표현으로부터 유래한다. 저예산으로 개런티가 낮은 배우들을 섭외하고, 쉽고 뻔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와 얄팍한 주제, 자극적인 설정, 억지스럽고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 등은 B급 작품들을 규정한다.
탄탄한 스토리나 빼어난 영상미 보다는 수용자들의 즉각적인 쾌감에 전착된 까닭에 좀비, 슬래시, SF 등 장르 영화에 집중됐다. 포르노도 일종의 B급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비록 싸구려지만 인간 본질의 한 측면을 가식없이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B급은 충분히 의미있는 콘텐츠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MBC ‘오로라 공주’는 이 같은 B급 장르의 프레임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작품이다.
전소민, 오창석 등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의 캐스팅, 삼각관계와 치정극으로 전개되는 뻔한 스토리, 분륜에 빠진 재벌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는 위에서 열거한 조건 중 어느 것 하나도 피해가지 않는다.
전체적인 설정도 마찬가지다. 세 집안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킨 것도 한눈에 보인다. 오씨 집안에 오로라와 황씨 집안의 황마마, 왕 여사 집안 막내딸 박지영(정주연 분)가 삼각관계를 이루고 오씨집안 둘째 아들 금성(손창민 분)과 왕여사 집안에 큰딸 박주리(신주아)가 불륜관계로 설정돼 있다. 세 집안이 삼각관계와 불륜의 얼개 속에 놓여있다.
캐릭터 역시 전형적이다. ‘하녀’와 ‘운전기사’를 데리고 다니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명품 매장을 휘젓고 다니고, 자신에게 예의 없이 굴었다며 다음날 일부러 매장을 찾아 직원을 골탕 먹이는 주인공 오로라의 모습은 우리사회의 부자 혹은 재벌에 대한 환상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남자주인공 황마마가 신비주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설정, 그의 누나들이 이탈리안 레스토랑 주인, 조각가, 성악가로 설정된 것도 비슷한 상류층 판타지다.
오로라가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싸달라 고집을 피우는 것은 B급 문화의 한 특성인 ‘병맛 코드’(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의 연장선이다. 오로라가 논리적인 척 할 수록 ‘잉여력’(무가치한 일에 쏟는 능력을 뜻하는 신조어)은 강도를 더 한다.
동생을 잘 키우기 위해 세 자매가 모두 결혼을 하지 않고 잠든 동생 곁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주문을 외우는 등의 파격적인 장면은 엄친아 판타지에 B급 상상력이 결합해 탄생한 명장면(?)이다.
가족드라마를 표방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고 가족 간의 사랑보다는 의심과 증오, 미움, 갈등으로 가득한 임성한 작가의 세계는 기괴하게 보이기까지 하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에게 이 기괴한 설정과 전개가 지극히 익숙하다는 점이다. 관전 포인트는 얼마나 더 강도 높은 설정과 대사를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뿐이다. 마치 한 시간 반 동안 주인공이 좀비 200명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죽이는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쉽게 ‘막장’이라고 불렸던 임성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B급 문화 하위 장르 중 하나로 재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미 우리는 그의 작품을 ‘임성한 월드’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이를 두고 유해하다 무해하다라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작품에 푹 빠져 등장인물과 함께 울고 웃던, 욕을 하던 그것은 리모콘을 쥐고 있는 사람의 선택이다. 부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 인간관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이기심과 욕망이 모든 캐릭터의 언행에 동인이 되는 작가의 관점만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작품 자체를 즐기는 데는 큰 해가 되지 않는다.
싸이 만큼 뼛속까지 B급 문화의 대가인 드라마 작가 하나가 있다는 것은 우리 대중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충분하다. 이 작품이 전세계 유튜브를 강타해 진정한 ‘임성한 월드’를 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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