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아직은 어린 배우 고아성(21)이다. 이 한국 여배우는 쟁쟁한 선배들과, 또 외국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어색함이 없다. 한 군데 모나지도 않았다. 봉준호 감독에게는 당당히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당찬 성격이기도 했다.
고아성은 영화 ‘괴물’에서 인상 깊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다른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감흥은 없었다(주변에는 드라마 ‘공부의 신’이 취향에 맞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보고 주목해야 할 배우임을 알게 된 이들이 많다. 너무 늦게 깨달아 또한번 미안할 지경이다.
고아성은 얼마 후면 할리우드에서 탐낼만한 인물이 돼 있지 않을까? 물론 미국에서 개봉 날짜를 확정하지 않은 ‘설국열차’가 얼마나 흥행하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지만….
‘설국열차’는 새로운 빙하기, 인류 마지막 생존 지역인 열차 안에서 억압에 시달리던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을 담았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고, 한국영화사상 엄청난 제작비인 450억원(할리우드에서는 저예산 영화에 속한다)이 투입됐으며, 외국 배우들이 함께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고아성이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건 특별한 과정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송강호, 봉준호 감독과 밥을 먹을 때 툭 건넨 이야기를 순간의 고민도 없이 함께하게 됐다. 물론 ‘괴물’에서 고생한 고아성을 향해 봉 감독이 “다음에는 예쁜 카페에서, 정말 예쁜 영화를 찍자”고 한 것이 내심 마음 한편에 있었을 텐데, 이번에도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혔다. 약속했던 ‘예쁜’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고아성은 “약간의 배신감이 있었다”고 웃었다.
이제 성인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텐데 누구의 딸로 나와 버린 건 아쉽기도 할 것 같다. 특히 ‘괴물’에서 이미 함께했던 송강호의 딸이라니…. 관객들에게 겹치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기자가 아쉬움을 토로하자, 고아성은 오히려 웃어넘긴다.
“천천히 변하고 싶어요. 급하게 뭔가를 딱 하고 보여줄 생각은 없어요. 오랜만에 나오는데 성인 연기를 하면 사람들이 더 거부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제가 22살인데 지금에서 더 나이 들면 이제 10대 역할은 못할 것 거잖아요. 그렇게 되기 전에 많이 해봐야죠.”(웃음)
고아성은 “‘괴물’의 현서와 ‘설국열차’의 요나는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현서는 수동적이었다면 요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독특하면서 능동적인 캐릭터죠.” 고아성은 이번 프로젝트에 적극적이었다. 봉 감독은 애초 요나의 캐릭터를 ‘괴물’의 현서와 비슷하게 잡았다. 커트 머리를 한 요나에 검댕을 묻힌 걸 상상하니 교복만 안 입었지 영락없이 현서 같았단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고아성은 머리를 길게 길렀고, 후드 달린 옷을 택해 차이를 줬다. “그래도 조금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또 있다. 아이들에게 세뇌 교육을 하는 교육 칸의 여선생에도 고아성의 의견이 담겼다. “감독님이 교육 칸 여선생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인데요. 대학교에서 만삭의 원어민 선생님 수업을 듣는데 학생들이 휴대폰을 사용했다고 압수하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한테 이 캐릭터는 어떻겠냐고 물어봤죠. 많은 부분 참여했다고요? 아니에요. 한 10개 말하면 한두 개 정도?”(웃음)
고아성은 “캐스팅이 오래전에 돼 대본 읽고 연기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할 말을 다하는 게 서로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물론 감독님이 말을 잘 들어주셔서 그런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감독님은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넘어가신다. 어떻게 설득을 해도 변하지 않는 고집이 있는데 무척 강하다”고 웃었다.
고아성은 틸다 스윈튼으로부터 얻은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스윈튼을 만난 건 “행운의 기회였다”고 기뻐하는 고아성. “틸다 스윈튼이 연기를 어떻게 연구하고 얼마나 열정을 쏟아 붓는지를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좁은 상상 속에서 아등바등하는지를 깨닫게 됐죠. 얼마 전에 한국에도 왔잖아요? 공식 일정 끝내고 이틀 정도 더 머물다 갔는데 마지막 저녁 식사를 같이 했어요. 속 얘기를 많이 했죠. 또 저한테 ‘감독님에게 나랑 영화 또 찍겠다고 조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자기는 또 같이 하고 싶대요.”
고아성은 또 “솔직히 연기할 때 대사를 통한 의사소통이 전부가 아니라 몸짓이나 눈빛이 중요한 데 외국 배우들과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음을 이내 깨달았단다. “크리스 에반스와 대화하는 신에서 눈을 보는데 괜한 걱정을 한 거였더라”고 웃었다.
500만 관객을 달려가는 ‘설국열차’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 성균관대 심리학과 학생인 그에게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물었다. ‘군중심리’이라는 전문용어가 튀어나왔다.
“요즘 개인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파워 트위터리안, 블로거가 생겼고 또 주목을 받잖아요. 나서서 얘기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거기에 쉽게 따라가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요.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사건, 사고 같은 이슈도 마찬가지죠. 또 크리티시즘이라고 해야 하나요? 요즘에는 친한 사이에 디스하는 것도 당연해진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오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많이 관람해주시는 것이니 감사하죠.”
영화는 할리우드도 강타할 게 분명하다. 고아성도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질문 하나. 할리우드 진출은? 고아성은 “이완 브렘너가 자기 에이전시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연락이 많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하진 못하겠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건 “할리우드가 목적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송강호 선배와 ‘스포츠 경기는 우열을 가릴 수 있어도 문화는 우열을 가길 수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좋은 영화가 할리우드에서는 이해 못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할리우드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겠지만, 최종 목표는 아닌 것 같아요.”
고아성은 ‘설국열차’의 한국 흥행에 자신이 몇 프로를 차지하는 것 같으냐고 물으니 “‘괴물’에서 나를 인상 깊게 본 40명 정도?”라고 겸손해했다. 하지만 10년 후쯤엔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고아성 때문에 영화 보러 왔다고 하지 않을까. 외국 관객도 고아성이라는 배우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 사진 팽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