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첫 술에 배부르랴?’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안 해본 것에 처음 도전할 땐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꼭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배우 김윤경(34)이 천사표 가면을 벗고 몰상식한 불륜녀로 둔갑했다. 첫 악역, 데뷔 이래 가장 강력한 한 방이다.
“원래 치고 빠지는 임팩트 강한 감초 역할인데 분량이 예상보다 늘어났어요. 처음엔 이 나쁜 여자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그저 답답했어요. 몰상식한 행동들은 다 하니까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속이 시원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재미있기까지 하다니까요!”
그가 극 중 맡은 은미란은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무개념 재벌 상속녀다. 등장부터 비호감이더니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느끼지 않는다. 물 따귀를 맞고도 분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며 승부욕에 타오르니 이 보다 나쁜 여자가 또 있을까.
“사실 은미란 출연을 두고 고심을 많이 했어요. 캐릭터가 너무 강하고 욕도 많이 먹을 게 뻔 해 주변 반대가 심했죠. 이런 역할은 처음이라 겁도 많았고 두려움도 있었어요. 하지만 놓치기 싫은 변신의 기회라…적은 분량이지만 선택하게 됐어요. 연기적으로 칭찬을 많이 받고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요즘 정말 오현경 언니와 온갖 욕을 다 먹고 있는 것 같아요. 네티즌들 댓글을 보니 오현경은 미친 여자고 저는 나쁜 여자래요.(하하) 실제로 지나가다가 아주머니들에게 등짝을 맞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어른들께 핀잔을 듣기도 해요. 제 주변에서조차 ‘너 이런 얘였어?’라는 말을 하고요. 무서워서 목욕탕도 못 가요.”
은미란의 불륜은 사실 가벼운 ‘서민놀이’에서 시작됐다. 정략 결혼을 통해 불행한 삶을 살아온 그녀. 이혼 후 이태란(왕호박)의 남편 허세달(오만석)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소소한 ‘여자’의 행복을 맛본다. 흥미가 떨어질 때 쯤, 수박(오현경)의 공격으로 인해 다시금 승부욕을 불태운다.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허세달에게 깊이 빠져든다.
“그야말로 재수 없는 캐릭터죠. 그런데 볼수록 맹한 면도 있고 귀여운 백치미도 있어요. 반응이 뜨거워서 그런지 은미란의 캐릭터가 점점 입체감을 갖는 것 같아요. 실제 제 성격도 바뀌어가는 지, 처음엔 오만석 선배가 너무 어려웠는데 이제는 선배가 저만 보면 말을 더듬고 살금 살금 도망가요.(깔깔) 착한 캐릭터를 맡았을 땐 늘 갑갑하고 힘이 없었는데 요즘엔 성격도 시원시원해지고 활발해 진 것 같아요.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워낙 크다 보니까 덩달아 신도 나고요.”
누가 봐도 전형적인 ‘차도녀’의 비주얼을 지녔지만 어렸을 땐 결코 이 같은 도전을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20대에는 생각지 못 했던 일들이 이젠 모두 가능해졌어요. 30대가 되고 또 엄마가 되고 나니 시야도 넓어지고 생각도 달라졌죠”라고 운을 뗐다.
“공백기 동안 육아에 전념하며 전형적인 ‘엄마’의 삶을 살았어요.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더라고요. 연기에 대한,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가슴 저릿할 만큼 느낀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온 힘을 다 해 연기해야겠다는, 무엇이든 못 할 건 없다는 자신감도 생겼어요. 복귀하면서 가장 큰 힘이 돼 준건 역시나 우리 남편, 그리고 가족이죠.”
그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띠었고 눈가는 이전보다 촉촉해졌다. 그는 “남편과는 7년간 연애를 했고 결혼한 지는 5년쯤 됐어요. 벌써 이 사람과 10년을 넘게 살았네요”라며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 했다.
“남편은 마음이 크고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에요. 오랜 시간 저의 곁을 지켜준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죠. 서로의 숨소리만 들어도 술을 몇 잔 먹었는지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 힘든 시간을 함께 해 애틋함이 커요. 긴 연예계 활동 안에서도 제가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았던 건 모두 남편 덕분이에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그는 데뷔 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요즘. 생애 가장 격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도 했다.
“결혼, 육아…인생의 큰 변화를 하나씩 경험하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은 오히려 더 커진 것 같아요. 처음 드라마 하는마음가짐이랄까?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감을 놓지 않아요. 주변 동료들의 연기도 꼭 모니터하고요. 이번 작품을 통해 뭔가 새로운 가능성? 배우로서 넓어진 스펙트럼을 인정받는다면 목표한 바를 다 이룬 것 같아요.”
지나가다 등짝을 맞고, 이유 없이 욕을 왕창 먹어도,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도 그가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이유. 그의 파격적인 변신이 유독 반가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펼쳐질 그의 연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기이기도 하다.
“항상 갈망했어요. 저만의 타이틀이 생길 날을…이제 조금 더 확신을 갖고 그 날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화려한 스타를 꿈꾸진 않아요. 그저 오랜 시간 연기를 하며 살고 싶어요. 많은 선배님들처럼…부단히 노력하고, 또 변화를 거듭해야겠죠? 이제야 제대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을 거예요. 저를 믿어주는 사람들, 제 안의 열정을 믿고…기대해주세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사진 강영국 기자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