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최북의 기행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금강산의 구룡연을 구경하고 잔뜩 술을 마시고는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연못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함께 있던 일행이 구해주어서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밖에도 어느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거절한 후, 협박을 당하자 남이 손대기 전에 내가 스스로 손을 대야겠다며 자신의 한쪽 눈을 스스로 찌른 일화도 잘 알려졌다. 늘 술에 취해있어서 하루에도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아예 술을 파는 사람이 집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럼 최북은 책과 종이들로 술값을 치렀다. 이렇게 술을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하자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가는 곳마다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때에도 괴팍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림 값이 적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찢어버렸다. 반대로 비싼 값을 주면 오히려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타박을 주었다. 그의 그림을 사려고 했던 이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대단히 무례하고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술주정뱅이로 여겼다. 하지만, 시를 잘 지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성호 이익이 송별시를 지어주었다는 점을 봐서는 미친 화가라는 당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옥죄는 현실을 잊고자 술과 광기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학문을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최북같이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화가는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의 예술은 당대의 그 어떤 양반들보다 오래 기억되고 있다. 붓이 아닌 손가락 혹은 손톱으로 그린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헝클어지고 불타오르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두운 밤,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옆을 지나 깊은 계곡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은 작게 그려져 있고, 초가집과 싸리담장은 물론 길옆의 마른 나무들 모두 뒤틀리고 기울어져 있다. 조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최북의 비명이 들린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활기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새로운 문화는 양반들의 사랑방이 아니라 여항(閭巷), 즉 백성이 사는 골목길에서 피어났다. 그 중심에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과 백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여전히 낡은 유교 이념을 내세워서 새로운 문화를 외면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최북은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 것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