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2000년 은서와 준서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안방극장을 강타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40%의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그 드라마를 통해 시트콤 배우로의 이미지가 강했던 송혜교는 일약 스타로 거듭났다. 드라마 내용을 소재로 한 소설 역시 출판될 정도로 드라마 한 작품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와 함께 OST도 그야 말로 ‘대박’을 쳤다.
기억을 할는지 모르겠지만 2000년 서울의 거리에는 몇 걸음 간격으로 리어카가 세워져 있었다. 그 리어카에서는 최신 유행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로 테이프 판매상이다. 대중음악의 인기의 척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는 이 리어카는 흔히 ‘길보드차트’로 불리기도 한다. 그 곳에서 2000년 후반을 장악한 노래는 ‘가을동화’의 OST ‘기도’다. 미소년 같은 외모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기도’를 부르던 가수 정일영을 만났다.
↑ 사진=천정환 기자 |
◇ ‘가을동화’ OST 가수 정일영
고등학교 2학년, 그 당시 라디오 전화 연결을 통해 노래를 선보였던 정일영에게 덕윤산업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그는 99년 KMTV 테크노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 정일영의 음색을 눈여겨봤던 팬엔터테인먼트(당시 KBS 드라마의 OST 제작담당 회사)는 그를 영입해 ‘가을동화’ 감독과 미팅을 가졌다. 이 감독 여기 정일영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드라마의 OST 가수로 채택했다.
“정말 부랴부랴 데뷔를 하게 됐죠. ‘가을동화’ OST 중 유승범이 작곡한 ‘리즌’(Reason)이라는 곡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테마라고 할 수 있는 그 노래가 첫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마스터링도 하지 않고 급하게 나갔고, 저도 급하게 데뷔 무대를 치른 셈이죠.”
정일영의 대표곡이 라 할 수 있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목소리 하나 만으로 OST에 들어가게 된 그는 ‘가을동화’라는 드라마 콘텐츠 인기의 힘에 더불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당시 정일영은 하루에 스케줄 8개를 소화할 만큼 아침 4시부터 그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정확히 24시간 동안 일을 했다.
그렇게 바쁜 날을 보내던 정일영은 2002년까지 소속사에 있다가 계약을 해지했다. 자신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회사였지만 ‘기도’의 흥행으로 OST의 소모품이 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전에 몸담고 있던 소속사 외에도 몇 차례 다른 소속사와 계약을 했지만 앨범 하나 얻은 것 없이 사기를 당했다. 얼마나 상처가 됐으면 그의 입에서 정확한 액수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그에게 또 제의가 들어왔다.
2004년 이클립스뮤직에서 제의를 받았다. 사기의 충격에 망설이던 그는 ‘겨울연가’ OST 가수 류와 함께 해외 활동을 함께 했다. 결국 이 시기에도 그는 류의 인기에 앨범 한 장 내지 못하고 또 다시 자괴감을 느끼던 터였다. 그러다 2006년 든든한 후원자이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그는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다.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졌어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상상하지 못랄 정도로 힘들었죠. 그 상황에서 유나이티드벡스와 계약을 하고 2집 격인 앨범 ‘여자는’을 발매했어요. 다시 일본에 진출해서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얻었던 때였어요.”
그의 말대로 그는 팬클럽 300명을 운집시키며 인기의 상승세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군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앨범을 내고 활동해야할 2007년 약 6개월 간의 활동을 끝으로 입대했다. 이때까지 인생은 그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 사진=정일영 공연 포스터 |
◇ 가수 정일영의 히트곡 ‘가을동화’ OST ‘기도’
제대 후 그에게도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가을동화’ 정일영이 아닌, 정일영이 부른 ‘가을동화’ OST ‘기도’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속속 등장했고, 그들이 정일영의 희망이 됐다. 2010년부터 본격적인 그의 행보가 시작된 셈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의 첫발은 물론 힘겨웠지만 기분 좋은 설렘이 지배적이었다.
“드라마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알리는 데는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가을동화’ OST ‘기도’는 그만큼 저에게 큰 힘이 됐죠. 동시에 제가 이겨내야 할 숙제이기도 했어요. 드라마의 감동을 되새기는 것보다 정일영의 ‘가을동화’가 됐으면 했죠.”
일본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많은 단독 공연을 해왔다. 덕분에 현지 사람들은 ‘가을동화’라는 꼬리표를 떼고도 정일영이라는 가수 자체를 응원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내 가요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한번 외국에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이 가요계에 제대로 선다는 것은 어렵더라고요. 계속해서 해온 사람들도 어려운데 오죽하겠어요. 한국 활동을 안 하고 외국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보니 균형 있게 활동을 못했던 것 같아요. 한국을 잊고 싶었던 것일 지도 모르죠. 너무 힘들었던 그 시기를….”
정일영은 대중들에게 강력한 한 방을 심어주려는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과거 ‘가을동화’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그는 다른 콘텐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차근차근 그리고 꾸준히 걸어 나갈 예정이다. 그 첫 발은 서울 강남구민회관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목요상설공연’에서 내딛는다.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관련 기사>
[M+그때 그 가수] 노아, 김준파로 다시 일어서다
[M+그때 그 가수] 꼬꼬마 가수 리치를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