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백대붕은 전함사(典艦司), 배를 만드는 관청의 노비라고 스스로 신분을 밝혔다. 여항문화를 이끌던 인물 대부분이 그래도 중인 신분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처해있었던 셈이다. 태어난 시기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후대의 학자들은 16세기 중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후에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실의 열쇠를 보관하는 액정서의 사약으로 일했다고도 전해진다. 어떤 경로로 노비인 그가 글을 배우고 시를 짓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함사와 액정서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보면 국가에 예속된 공노비였으며, 관청 일을 하던 와중에 글과 문학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던 그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허균의 형인 허봉을 비롯한 양반들과도 가깝게 지냈다는 기록을 보면 자존심 강한 양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천한 노비가 시를 잘 짓는다는 이유로 양반들과 어울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에는 허봉의 형인 허성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기도 했다. 허균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으로 봐서는 아주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지은 시는 단 두 편만이 남아있다. 그 중 한편인 취음(醉吟)은 술에 취한 그가 길에 누워서 자고 있다가 행인이 깨우자 시로서 대답한 것이다.
醉揷茱萸獨自娛 술에 취해서 수유를 꽂고 혼자서 즐긴다
滿山明月枕空壺 온 산에 달빛이 가득한데 나는 홀로 빈 술병을 베고 자네
傍人莫問何爲者 사람들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말게
白首風塵典艦奴 나는 바람결에 백발을 휘날리는 전함사의 종이라네
유유자적하면서도 풍류에 젖은 모습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전함사에 속한 종이라는 한탄 섞인 고백도 보인다. 만약, 그가 자신의 솜씨를 알아주는 양반들의 칭찬에 으쓱하기만 했다면 오늘날까지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잘 짓는 노비로 멈추지 않았다. 사람 대다수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주저앉을 때 그는 시로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점들이 비슷한 처지의 하층민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서 천민이지만 시를 잘 지었던 유희경과 더불어 시회를 만든다. 풍월향도라고 불린 이 시회에는 백대붕과 유희경, 정치 등 천인과 중인들이 참석했다. 미천한 신분의 백대붕 등이 양반들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던 시회를 조직했다는 점은 단순히 재능을 뽐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의 울분과 불만을 시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서로의 아픔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여항문인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전함사의 종이라는 신분에 대한 울분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동료끼리 그런 감정을 공유했다는 점은 예술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하지만, 풍월향도 모임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끝나게 된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서 왜구를 막게 한다. 이일은 휘하 군관을 뽑을 때 백대붕을 고른다. 일본에 갔다 왔으니 그들을 잘 알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일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간 백대붕은 상주에서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한계와 울분을 시로서 씻어냈던 위대한 시인의 삶이 끝난 것이다. 그와 절친했던 유희경 역시 전쟁터에 뛰어든다. 의병을 일으킨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고, 공을 인정받아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유희경은 맥이 끊겼던 풍월향도를 다시 일으킨다. 비록 백대붕의 자리는 없었지만, 그의 뜻이 이어진 것이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