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가 감히 글을 배우는 것도 모자라서 양반들을 가르치는 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심지어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학수처럼 말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는 수복(守僕)이었다. 수복들은 대대로 이어져오는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오늘날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같은 곳 종교시설들이 치외법권 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성균관과 수복들이 사는 반촌 일대는 공권력이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도둑을 잡으러 들어갔던 포도청 관리가 파직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던 노비인 그가 어떻게 양반들을 가르치게 되었을까?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성균관 유생들의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글을 깨우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성균관 노비들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체득한 학문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균관 동쪽의 송동이라는 곳에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마도 그의 실력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서당은 우리가 사극에서 본 것처럼 자그마한 문간방이나 대청마루에 아이들 몇 명을 모아놓고 천자문을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강당이 있었고,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경쇠라는 작은 종을 울렸다고 하니까 보통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인기 강사의 강좌에 수백 명이 몰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실력은 대단했는지 밑에서 배운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출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양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교류했는데 개중에는 그를 우암 송시열과 비교하다가 곤혹을 치룬 선비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성균관 노비 출신의 서당 훈장 밑에서 양반 자제들이 글을 배우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사실은 당대에는 꽤나 이슈였다. 조수삼도 추재기이에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풍을 칭찬하는 글을 남겨 놨으며 정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무식하다는 이유로 양반들에게 구박과 업신여김을 당하던 민중들에게 그는 영웅이자 스타로 비춰졌을 것이다. 양반들도 정학수의 천한 신분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을 맡겼다. 오늘날로 치면 스타 강사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의 이야기는 당대에 쉼 없이 오르내렸으며 심지어는 죽은 이후에도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정학수가 단순히 잘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출신성분과 뛰어난 글 솜씨가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명강사는 수억 원 대의 수입을 올리고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것은 공부를 통해 출세 혹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반이라면 무조건 과거를 봐야만 하고 그것이 유일한 성공이었던 조선시대에는 공부에 관한 한 오늘날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런 과열된 열기가 성균관 수복 출신인 노비를 추켜세우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정학수의 실력과 인격이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