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1996년 ‘많이많이’로 데뷔해 1위 후보에 오르며 빠르게 인기그룹 반열에 오른 구피는 2집 ‘비련’으로도 메가히트를 기록하며 지상파 1위 후보에 올랐다. 당시 9주 연속 1위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유독 지상파 1위와는 인연이 없는 안타까운 그룹이었다.
이후로도 구피는 ‘모두 잘 될 거야’ ‘쇼크’ ‘게임의 법칙’ ‘긴가민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매하며 흔히 ‘틀면 나오는’ 그룹으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며 객원보컬 투입 등 그룹의 형태를 바꾸기도 했고다. 지금은 대중매체를 통해 자주 다뤄지지 않지만 꾸준히 멤버들 간의 교류를 멈추지 않고 있다.
흔히 구피의 전 멤버로 알고 있는 이승광은 활동 당시 메인 보컬로 빼어난 가창력을 뽐낸 바 있다. 그룹의 형태 변화, 그리고 개인적인 사업 등을 이유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는 여전히 구피의 멤버고, 구피라는 이름으로 함께 공연장에 서고 있다. 이승광이 운영하는 강남의 한 피트니스에서 그를 만나 근황을 물었다.
◇ 지상파 3사 휩쓸었던 ‘대박’ 그룹 구피
1996년, 20살의 나이로 구피라는 그룹으로 데뷔한 이승광은 그야 말로 ‘벼락 스타’가 됐다. 자고 일어났더니 대박 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지상파 방송 3사의 온갖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를 증명했다.
“진짜 틀면 나오는 그룹이었죠. 하루에도 지상파 방송 스케줄이 5개~6개가 될 정도였어요. 아마 예전에도, 지금도 그렇게 하는 분들은 없을 걸요? 말 그대로 ‘핫’(hot)했죠. 재석이 형도 이 정도는 아닐 거예요(웃음).”
문제는 당시 여느 그룹들이 그랬듯 구피도 수입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며 방송이란 방송에 다 출연했고, 앨범도 수없이 팔아치웠지만 경제적으로 이들을 여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니 당연히 심적으로도 편치만은 않았을 거다.
“말 그대로 노예 계약이었어요. 제작자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바보였던 거죠. 지금 가요계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허다했어요. 활동비로 미리 쓰고, 실제 수입으로 갚는 거죠. 일종의 신용카드라고 할까요?”
영원할 줄 알았던 인기는 생각지도 못하게 식었다. 5집 앨범부터는 급격히 인기가 떨어졌고, 자연히 수입도 줄게 됐다. 그나마 조금이었던 수입이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승광은 간간히 들어오는 행사들로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입을 얻은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가게 됐다.
◇ 앨범의 연이은 실패, 공황장애까지 겪어
“다들 연예인 하다가 다른 일을 왜 못하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당시 연예인은 진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 사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대우를 받던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2000년부터 큰 빛을 보지 못하고 프리로 활동한 그에게 여러 엔터테인먼트에서 러브콜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가요계라는 곳에 상처를 입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비뚤게 보였다. 큰 소속사는 또 한 번 노예계약을, 작은 소속사는 이용당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황장애가 와서 심리 상담을 받았어요. 심지어 당시 만난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죠. 안면인식장애라고 하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나긴 해야 하는데 이전에 받은 상처들 때문에 의심만 쌓여갔죠.”
그러던 그의 마음을 잡아준 것이 바로 운동이었다. 우울증이 안 오면 이상할 정도의 삶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그는 24시간 헬스장을 등록하고 사람들이 없을 시간을 선택해 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2007년 서울시장배 보디빌딩대회 70kg급 1위를 차지하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운동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중에 만난 아내와의 결혼 생활로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단칸방에서부터 어렵게 출발했지만, 그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묻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득남의 기쁨도 누렸다.
“당시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했어요.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이었어요. 반지도 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노력해서 꼭 반지를 끼워주겠다고 약속했죠. 그 약속은 지켰는데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어요. 작년에 치를 생각이었는데 아이를 갖고, 올해 출산을 하다 보니 또 미뤄졌죠. 내년에는 꼭 할 생각이에요.”
◇ “음악은 무기, 운동은 직업”
“이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다 보니 주객이 전도가 됐어요. 이제 음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에요. 어찌되었든 전 음악인이니까 이걸 놓지는 못하지만, 하나의 자유이자 내 끼를 분출시킬 수 있는 장치죠. 음악은 제 무기인 셈이죠.”
현재 그는 올해 발매를 목표로 앨범을 준비 중에 있다. 아이돌과 트로트 사이에서 무엇을 들어야 할지 망설이는 30대 후반, 혹은 40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세미트로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현재 그는 녹음을 모두 마친 상태로 컴백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광이라는 사람을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방송 활동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사람들이 ‘구피는 해체한 거냐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 트위터 @mkculture